보고 나서 쓰다.
높은 연봉에 괜찮은 직업, 남성, 서울 출신, 서울대 출신, 비장애인, 이성애자... 주류 혹은 표준으로 분류되는 내 삶의 조건이다. 반면 나에게 비표준 혹은 주변부성을 부여하는 조건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과거 경험에서라면 다 무너져가는 학생운동의 소수파였다는 것, 일터에서라면 비슷한 연차 친구들에 비해 나이가 꽤나 많다는 것, 개인적인 삶에서라면 내 어머니가 이혼했고 누나도 이혼했다는 것 정도다. 특히나 두 사람의 이혼 과정에서 내가 겪고 생각한 것들은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류라는 게 좋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내가 창작자로서 만들어온 것 중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은 다 주변부적인 정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한 것들로부터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고리타분하고 꼰대스러운 게 주류의 생각이니,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주류의 눈이 아닌 주변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써왔다.
나름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다가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주류의 안락함으로 시나브로 퇴각해 왔는가를.
이 책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모든 인간이 똑같은 인간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체 게바라나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인간과, 지적장애나 발달장애 때문에 주체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인간의 가치가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는 막연하게,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라고 막연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조차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는 평생을 두고 고민할 것이다. 나는 과연 타인과 평등한가? 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몸의 장애로 인해 나는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없고, 죄 없이 혐오받거나 따돌림당하며, 수많은 사회적 기회가 박탈되고 있는데, 나는 과연 타인과 평등한가?
그걸 증명해내야만 그 끝에서 자신의 삶이 존엄하다는 결론을 간신히 얻을 수 있다면, 그 증명 과정은 얼마나 숙연한 일일까. 깊은 고민 없이 평등을 말해온 나는 부끄러웠다.
선천성 골형성 부전증을 앓는 작가 김원영은 이 숙연한 증명과정을 거쳐 왜, 어떻게 모든 인간이 존엄해지는지 해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은 섹시한 몸이나 똑똑한 머리 같은 외형상의 조건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내용이 무엇이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써 내려가는 저자라는 특성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이었다.
인간이 타자 혹은 역경과 부딪혀나가는 과정에서 노동하고 고뇌하며 써 내려가는 자기 삶의 이야기. 그것이야말로 외형적인 조건이 어떻든, 어떤 나라에 태어나서 어떤 경제적 계층으로 살아가든, 그 이야기의 구체성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삶의 서사를 써 내려가고 편집할 수 있다는, 자기 인생의 편집권을 소유하고 있는 한 존엄하다.
매력의 불평등
하지만 논리적으로 내가 당신과 평등하다 해도, 불구인 몸 때문에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평등하다는 당위적 선언은 현실의 삶에서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몸으로 인한 매력의 불평등과 그로 인한 기회의 박탈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김원영이라는 인간이 세상의 장벽을 돌파해나가며 단단하게 벼린 사유의 흔적이 느껴지는, 다음 단계의 질문이다. 그는 앞 단계의 사유를 통해 자신이 ‘저자성’을 가질 때 다른 인간들과 함께 존엄하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게 평등함을 ‘알고 있는' 나는 현실의 당신에게 선호받지 못한다. 어찌할 것인가?
그는 아름다울 기회를 평등하게 갖자고 제안한다. 어떤 순간이 박제되는 ‘사진적 아름다움’의 틀로 보면 멋지다 할 수 없는 몸이지만, 긴 시간을 준 뒤 그가 가진 최선의 색을 골라내 붓질을 하는 ‘초상화적 아름다움’의 틀로 보자면 (척추가 뒤틀린 장애인이라도) 누구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초상화를 만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원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며, 타인으로부터 초상화를 발견해낼 수 있는, 혹은 그가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시간을 주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정신 승리 아닌가?
하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고 같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선언은 그저 정신 승리에 불과한 것 아닐까?
김원영의 사유는 여기까지 닿는다. 자신이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알고, 타인 앞에 아름답게 나타나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생각하고 나서도, 혹시 이 모든 생각은 휠체어 위 뜬구름 잡는 생각들이 아닌가 회의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며 세상과 부딪혔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전동 휠체어를 이끌고 시내를 질주하며 짜릿한 해방감을 맛보았던 시간. 비록 세상 사람들이 웬 시설 장애인들의 행렬이냐며 눈을 흘기더라도 그렇게 세상으로 나가 타자성과 부딪혔다. 부딪힐 때마다 선명하게 감각되어 오는 자신을 그려내고 세상을 해석하며 정신의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 승리는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현실 세계에 대해 승리한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와 부딪히며 노동하며 만들어진 ‘정신의 스타일’은 그 이후 현실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타자들 안에서 반복 수행되며 자신의 삶을 그 스타일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이끌어간다. 이것은 정신 승리가 아니라 삶의 승리다.
2003년 대학에 입학한 이후, 스물몇 살의 나는 교정에서 종종 휠체어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았었다. 대학에 들어간 시점부터 어른이 되어 나온 지금까지 우리는 동시대에 비슷한 길이의 시간을 살았을 텐데, 그만이 도달한 깊이는 아득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