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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바다 Jul 04. 2019

발랄한 의심


지난달 초 한국에서도 퀴어 퍼레이드가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사람들이 참여해서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나 역시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에서 해방감을 맛보려고 비 올 때나 더울 때나 자주 갔었으나, 웬수같은 야근, 야근, 주말근무에 묻혀있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몇 주 후 광화문 근처에 가서 놀라운 풍경을 보고 말았는데,




바로 이것이다. 동아일보사 건물을 물들인 형형색색의 무지개. 아, 이게 웬 천지가 개벽할 일인가.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중앙 일간지 사옥에 웬 레인보우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근처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퀴퍼(퀴어 퍼레이드) 며칠 후 동아일보사가 창문 색을 이렇게 아름답게 바꾸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퀴퍼가 있었던 달에 창문을 무지개색으로 도색한 동아일보 건물. 오비이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한편으로 작년 동아일보엔 주변엔 항상 성소수자가 있다라는 전향적인 외부필진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그런 전력도 있고 하니 이 건물을 본 퀴퍼 참여자들은 나처럼 아연실색하며, 야 세상이 정말 바뀌었구나 생각하다가, 아니야 우연의 일치겠지, 동아가 구글이냐, 등의 갑론을박을 벌였을 터.


호기심이 넘치는 누군가가 동아일보사에 문의했다고 한다. 혹시 퀴퍼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창문을 무지개로 물들였나요? 동아일보 관계자는 물론 극구 부인했단다.


하지만 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겠다. 보면 볼수록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혹시 이 창문 도색을 기획한 책임자는 퀴퍼와의 연관성을 부인한 뒤 퇴근길에 자기네 회사 창문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지 않았을까? 그가 은밀하게 받쳐 입은 하얀 티셔츠엔 빨간색 Love Wins! 따위의 글자가 쓰여있진 않았을까?





얼마 전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으로 다시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 사진을 보니 유명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지사에 상원 의원에, 심지어 1969년 당시 문제의 원인이었던 경찰들까지 몰려나와 퀴어 퍼레이드에 함께하고 있었다. 아, 얼마나 멋진 풍경인지.


내년 이맘때 휴가를 쓸 수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성대한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는 도시에 찾아가 보고 싶다. 가장 억압받는 사람조차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현장이라면, 그곳만큼 긍정적인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장소는 또 없을 것 같다.



2019년 뉴욕 퀴어 퍼레이드에 함께한 NYPD (로이터)
2019년 뉴욕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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