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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Feb 24. 2019

착한 아이의 친구 헐뜯기

걔는 삼중 인격이에요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할 기회가 많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들고서 어떻게 노는지(거의 예외 없이 틱톡), 요즘 재밌어하는 콘텐츠는 무엇인지(마인 크래프트에서 파생한 각종 놀잇거리들) 등을 보면서 아이들의 다양한 사생활을 엿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다.


최근에 만난 초등학생 여자 아이 미서(가명)는 처음에는 낯을 좀 가렸지만 보름쯤 붙어있었더니 꽤 마음을 열고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둘이 같이 걸어가는 길에 미서가 자기가 좋아하는 이모저모에 얽힌 이야기들이나 주변의 친구들에 대한 뒷얘기까지 나눠주곤 한다. 나는 아이가 맥락 없이 그런 얘기를 꺼낼 때면 즐거운 마음으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경청했다. 학교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반장이라는 미서가 얼굴에 살짝 웃음기를 띄우고 조잘조잘 얘기를 늘어놓는 모습은 참 귀여웠다.


아이는 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딱 한 번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학교에 촬영 갔다가 나도 몇 번 만났던, 같이 어울려 노는 윤주(가명)라는 아이에 대한 얘기였다. 윤주는 어른 앞에서는 착한 척하고 조금만 아파도 우는 등 온갖 힘든 척을 하지만, 자기들 앞에서는 그 어른을 헐뜯고, 다른 친구들 앞에서는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친구들 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미서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이중인격… 아니 걔는 삼중 인격이에요.” 미서가 말했다.

 


윤주는 부모님이 중국인이라고 했다. 조선족 교포인지 진짜 중국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 아빠가 이주노동자인 것 같았고, 그런 부모님도 지금은 중국에 가 있어서 윤주는 (미서의 표현에 따르자면) ‘아주 무서운’ 할머니 손에 자라고 있다고 했다. 윤주가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에서 자라지는 못했으리라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미서가 행여 ‘걔가 중국애라 그래요’ 같은 말을 할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미서는 윤주가 한 나쁜 행동에 대해서만 비판할 뿐, 윤주의 배경을 끌어들여 헐뜯지 않았다. 내가 이걸 특이하게 느낀 것은 어른들의 세계는 보통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상대의 나쁜 행동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잘못된 행동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다른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목조목 이런 행동이 잘못됐다고 미서처럼 설명할 말이 부족하다. 그래도 욕은 하고 싶으니 자연스레 상대의 배경이나 정체성을 싸잡아 혐오하며 자신은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미서와 같은 상황이라면 ‘역시 그 짱개x’ 같은 표현을 쓰는 식이다. 여자라서, 어려서, 전라도/경상도 사람이라서, 게이/레즈비언이라서, 좋은 대학을 못 나와서, 군대를 안 갔다 와서, 사람들은 별 잘못도 없이 욕을 먹는다.


복주머니 모양의 고리


제주도 촬영 끝에 미서와 나는 기념품 점에 갔다. 나는 미서가 자기 인생에서 두 번째로 제주도에 왔다며 같은 반 친구들의 소소한 기념품을 고르는 기특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서는 총 일곱 개의 제주도 열쇠고리를 골랐다. 하나하나 누구 껀지 물어봤는데 그중에는 윤주 것도 있었다. 작고 귀여운 복주머니 모양의 고리였다. 어른들 세계에 너무 오래 살아온 내겐 그게 반전이었다. 


아이는 카운터에 가서 꼬깃꼬깃 몇 장의 지폐를 꺼냈다. 그런데 어제 제주도 오는 배에서 오락실에 갔다 온 탓에 그만 돈이 부족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지갑을 열어 몇 천 원을 보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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