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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Aug 28. 2018

무모해서 아름다운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이십 대 여자다. 연신 소주잔을 들이붓다가 남자 얘기를 하며 훌쩍훌쩍 운다. 듣자 하니 남자는 나쁜 놈이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 친구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것이다. 헤어지고 이 여자를 만날 생각도 잠시 한 모양이지만 결국은 야멸차게 여자를 밀어내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한 직장에서 일하며 매일 마주치는 그 남자를 여자는 쉽게 잊지 못했다.


이 여자를 알고 지낸 지가 8년째다. 방에 가면 여기저기 남자 아이돌 그룹 사진이 붙어있었던 전형적인 여고생. 나는 수능을 네 달 앞둔 아이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이었고 아이는 학교에서 전교 몇 등쯤은 하는 기대주였다. 아이가 실력이 좋아서 진땀 흘리며 가르치던 기억이 선연한데, 그 아이가 대학생이 되고 학생회장이 되고 진로 고민도 하다가 일자리를 얻고 흘러오며 나이 먹는 시간들을 친동생처럼 지켜보았다.


이제 스물일곱 살. 그 사이 쌍꺼풀도 하고 어린애 티도 벗은 어엿한 아가씨가 됐지만 유독 사랑에 서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누군가 노래한 대로, 어쩌면 우리는 너무 보통의 존재들이어서 어디에나 흔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봐주는 사람을 (누구나) 만나기 마련이고 그런 인연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걸 믿게 해주고 싶었는데, 역시 실패했다. 온갖 이론을 주워다가 "그건 사랑도 아니"라고 늘어놔봐도 그의 눈가는 여전히 촉촉하다. 그가 묻는다. "그래도 그 남자 나쁜 사람은 아니죠?" 답정너의 간절한 표정... 그래, 사랑을 할 때는 누구나 어리석기 마련 아닌가. 처음에는 남자놈의 나쁜 면들을 짚어주다가 그 눈먼 마음의 과녁에서 번번이 빗겨 나는 내 말의 화살들이 부질없어 이윽고 생각을 바꾸었다.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그냥 더 가보라고 말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더 해보라고. 하얗게 자신이 타버릴 때까지 그 남자한테 네 모든 걸 던져보라고. 그래도 사람 죽지는 않는다. 오히려 폐허가 된 자신을 뒤늦게 뒤적이다 잿더미 속에 피어난 하얀 꽃 한 송이의 생명력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당장의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가볼 가치가 있으리라. 불안해서 골방에 틀어박힌 삶보다는, 무모해도 움직이는 삶에 반전은 찾아온다. 그러니 혼자 길을 걸어갈 그를 속으로 응원하며 지켜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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