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의 봄, 2년간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서
2년 2개월의 길고도 짧았던 연애에 마침표를 찍은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이별 후 난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됐다. 딱히 의존적인 편도 아니었는데, 처음 이별하는 열여덟 살처럼 한심하게 살았다.
밥도 혼자 못 먹어서 매일 저녁에 약속을 잡았다. 맨 정신으로 캄캄한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조금은 취한 채로 귀가했다. 매일 밤 악몽을 꾸고 한 시간에 한 번씩 깨는 게 싫어, 친구를 불러 밤늦게까지 떠들다가 자기도 했고, 꼬박꼬박 챙겨보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도 집중하지 못해 밀렸다. 매일 쓰던 일기는 단 한 줄도 못 쓰겠어서 헤어진 날 이후로 펼쳐보지도 못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보고 감사해했던 내 루틴이, 평화로운 일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풋내기처럼 어리바리하게 구는 내가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혼자서도 잘 지낼 줄 알아야 연애할 때도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아서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 같다. 하루빨리 혼자 지내는 삶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몰아세웠고, 헤어진 지 일주일 만에 내 사진을 다 지웠다는 그 사람의 회복 속도가 무서웠다. 나는 미련도, 정도 많아서 시간이 더 필요한데, 나만 이 이별에서 부진아가 되는 기분. 그냥 남들처럼 '헤어질 수도 있지' '또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도대체 왜 내 이별엔 내성이 안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불안감은 한동안 잠잠했던 공황장애를 다시 불러왔다. 지하철에서, 차에서, 실내에서. 헤어진 지 3주 만에 공황장애 증상이 3번이나 나타났다. 누굴 탓하랴. 내 삶에 더 이상의 이별은 없을 거라 믿었던 내 오만함과 도망칠 구멍도 만들어놓지 않은 내 안일함을 원망하는 수밖에.
몸도 멘탈도 약해져 술자리에서 우는 나를 보고 누가 그랬다. 20대 초반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다. 스물여덟이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음 스텝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깟 이별쯤, 힘들긴 하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믿고 빨리 일상을 되찾을 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이별을 하고, 이번에 내 차례가 됐을 뿐이니까. 그 재수 없는 말에 오기가 생겨서 그날 이후로는 한 번도 안 울었다.
계속 바보처럼 굴기 싫어서 뭐라도 했다. 그가 빠져나간 시간에 얼른 뭐라도 채워 넣자는 마음으로. 하릴없이 시체처럼 누워있는 게 싫어서 탁구 레슨을 등록하고 (사람은 움직여야 에너지가 생기니까!)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땀 흘려 운동했다. 다른 평일엔 못 만났던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주말엔 아빠랑 같이 운전 연습을 했다. 장롱 면허 8년 차, 운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었는데 날씨가 좋아지면 직접 차 끌고 놀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게 싫어서 예쁜 옷을 사 입고 화장도 열심히 했다. 내가 좋다는 사람이랑 마음에도 없는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너무 바쁘게 산 나머지 생기 없고 퀭한 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긴 했지만, 그래서 한 달만에 4킬로그램이나 빠진 건 좀 이득인가. (이별 다이어트... 효과 만점이다.)
이와 더불어 이별을 완벽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어떻게 우리가 헤어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가!'라며 부정할 게 아니라, 팩트를 직시하는 것. 꽤 오랫동안 함께 탑을 쌓아 올렸지만, 내가 눈치채지 못한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었을 거다. 공든 탑 위에 다음 돌을 올리려고 내가 애쓰는 동안,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다른 탑을 쌓으러 갈지 고민했을 거고 그는 결국 그 자리에 탑이 없었던 것처럼 무너뜨리고 떠났다. 탑을 더 높이 쌓기 위해 고민했던 것도, 무너진 탑의 잔해를 허무하게 지켜보던 것도 나 혼자. 그게 우리의 이별이다. 출퇴근길과 잠들기 전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 회사에서 점심 메뉴는 뭐였는지 사진을 주고받을 사람, 같이 휴가를 계획할 사람, 모든 스케줄을 공유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주말을 함께할 사람,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래도 함께 탑을 쌓아 올리는 동안 눈물 나게 행복했으니까, 한순간도 뺀질 대지 않고 난 최선을 다해 탑을 쌓아 올렸으니까, 이번 연애에 후회는 없다. 좀 요령을 부릴 걸 그랬나 싶다가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다음 탑을 쌓을 때도 나는 끝까지 온 힘을 다해야지. 이별해봤자 딱 이만큼, 내가 아는 만큼 아플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별과 후유증을 똑똑히 기억하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엔 의리있게 나랑 끝까지 탑을 쌓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지.
스물여덟 살에 혼자서 잘 지내는 연습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확실하게 안 괜찮은 날보다 괜찮은 날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매일매일 혼자 잘 지낼 수도 있게 되겠지.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