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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유정 Apr 20. 2022

에일리는 헤어지고 노래가 늘었는데 너는 뭐를 늘릴래

내겐 이별도 기회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이별한 지 거의 두 달이 지났다. 이별했어도 월요일은 꼬박꼬박 돌아왔고, 월급 받으려면 아무리 힘들어도 아침에 몸을 일으켜 회사에 가야 했다. '이제 내 옆에 네가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다가도, 정말 다 때려치울 자신은 없어서 이전처럼 모든 걸 해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별도 한철인데 기왕이면 멋지게 이 시기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 앞으로 내 인생에 애인이랑 헤어질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넉넉하게 30대 중반에 결혼한다고 쳐도 많아 봤자 3번 정도일 거다. 인생의 소중한 변곡점을 허투루 보낼 순 없다. 에일리 언니는 헤어지고 나서 노래가 늘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나는 뭐를 늘려볼까?




"패션 템을 늘려볼래"

엊그제 카드값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지난 한 달간 망나니처럼 카드를 긁어댔더니 쇼핑에만 거의 월급의 반을 쓴 거다. 그래도 좋았다. 매일 새 옷을 입고, 옷에 맞게 공들여 화장을 하고 외출하는 기분이 여간 째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결혼자금 모은답시고 맘껏 써보지도 못했는데 꽃다운 나이에 정말 미친 짓이었다. 지금 내 나이에 해야 하는 일은 예쁜 옷, 유행하는 옷,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사 입고 놀러 다니는 거다. 새 꼬까옷을 입고 나가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발걸음도 괜히 가볍다. 회사에서 택배 도착 알림 문자를 받고 기다리는 시간도, 퇴근 후 집에 와서 택배를 뜯는 것도 짜릿하다. 성에 찰 때까지(=지갑이 허락할 때까지) 패션 템을 늘려보는 걸로.


"예쁨 지수(?)를 늘려볼래"

연애하고 6킬로그램이 쪘다. 이전에 입던 바지가 작아서 안 맞았고, 살찐 만큼 편한 옷을 찾게 돼 주로 맨투맨이나 품이 넉넉한 니트를 입게 됐다. 근데 헤어지고 4킬로그램이 빠졌다. 전 남친이 워낙 먹성이 좋아서 항상 나까지 과식하게 됐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으니 저절로 빠진 거다. (...역시 너 때문이었어.) 회사 사람들도 살 빠졌냐고 물어본다. 그 김에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점심에도 밥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 탁구 레슨 받는 날은 간단하게 때우기. 빨리 체지방 빼고, 근육은 붙여서 건강한 몸매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또 예뻐지려면 뭐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지난 주말엔 점을 뺐다. 이번 주말엔 보톡스를 맞아볼까 싶다. 또 뭘 해볼까? 추천 좀요.


"탁구 실력을 늘려볼래"

탁구동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바로 '헤어지면 탁구 부수가 2개 오른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니 탁구에 제대로 입문했던 3년 전 그때도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코치님이 스매시를 할 때 제일 미운 사람을 떠올리라고 했다. 당연히 전 남친을 떠올리며 라켓을 휘둘렀다. 나한테서 이런 파워가 나올 수 있나 싶었다. 탁구가 너무 재밌었다. 탁구공이 테이블에 맞는 소리가 경쾌해서 기분도 좋고, 게임에서 시원하게 득점하면 답답한 마음도 좀 뚫리는 것 같고, 공에 집중할 땐 전 남친 생각도 안 났다. 그래서 헤어지고 다들 그렇게 실력이 느는 건가 보다. 좋네, 이 기회에 코로나 때문에 정체된 탁구 실력도 늘려보지 뭐.


"주량을 늘려볼래"

어... 이거는 근데 힘들 것 같다. 술 잘 먹는 언니들 뭔가 멋있어서, 주량 좀 늘려보겠다고 소주에 도전해봤는데 1병 먹고 1시간 동안 토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직도 초록색 병만 보면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웩. 나 같은 술찌한텐 맥주가 딱이다.


"운전 실력을 늘려볼래"

장롱 면허 8년 차였다. 앞으로도 운전할 생각은 없었다. 서울에서 살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내겐 자차가 필요 없었고, 딱히 운전에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겁도 많고... 길도 잘 못 찾고... 방향 감각도 없고... 여러모로 ㅎ) 꼭 운전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남친이 운전할 줄 아니까 S.O.S 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제 급하게 차를 몰아야 할 상황이 생겨도 대신 와서 운전해줄 사람이 없다. 진정으로 홀로서기하려면,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다. 아빠한테 주말마다 연수받다가 최근엔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 못 하고 있는데 다시 운전 연습을 해야겠다. 필요하면 차도 사지, 뭐.


"필력을 늘려볼래"

브런치에 연애 에세이를 연재했을 , 이별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솔직히 양심에 너무 찔렸다. 행복한 연애를 하는 주제에, 내가 감히 이별에 대해 글을  자격이 있나 싶어서. 그런데  '자격' 주어진 거다. 바로 지금!^^ 이별은 좋은 글감이 된다. 감정이 예민해지고 생각이 깊어져서다. 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 노래도 많이 듣고 드라마도 많이 보게 되니까  그런  같다. 이별에 대해 글을 쓰느라 추스렀던 마음이 무너지면 곤란하겠지만, 회복할  있을 정도로만 이별을 곱씹고 글을 쓰려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별한철이니까.




이별을 기회로 삼다니. 다 쓰고 나니 또라이 같은데, 꽤 멋진 마인드인 것 같다. 더 이상 눈물을 낭비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날부터 정말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했고,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고 계속 되뇌인 결과다. 정신 승리에 꽤나 재능이 있는 듯하다. 근데 정말 그렇다. 이별은 기회다. 나한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기회. 삶을 정비할 수 있는 기회. 놓치고 살 뻔했던 것들을 후회하기 전에 되돌려놓을 기회. 이별은 거지 같지만, 주저앉지 말자. 멋지게 살자!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서 마냥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기엔, 내가 너무 젊고, 예쁘고, 매력적이다.


Photo. 김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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