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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유정 May 13. 2022

이별 직후로 돌아가 주저앉은 내게 꼭 해주고 싶은 말

넌 강한 사람이야 반드시 이겨낼 거고 다시 사랑할 수 있어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이별의 슬픔에 하염없이 잠식되는 유형과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유형. 찼든 차였든 간에 나는 주로 전자에 속했다.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됐는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달라졌을지,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있을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텐 사랑이 전부였으니까. 내가 가진 걸 몽땅 다 잃는다고 해도 사랑만 있으면 아무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했던 사랑이 끝났으니 내 존재 이유가 통째로 흔들릴 수밖에. 머릿속은 온통 상실로 가득 찼고, 초점 없는 퀭한 눈과 기운 없는 몸뚱이로 마지못해 살아냈다. 어쩌다 간신히 기운을 차릴 새면 그 에너지를 눈물을 쏟는 데에 썼다. 미처 지우지 못한 사진을 다시 보고, 예전에 나눴던 카톡을 찾아 읽고, 헤어진 사람의 SNS에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스스로를 상실의 구렁텅이에 점점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그랬기에 이별 직후  삶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사랑이  멀리 달아나는 줄도 모르고 혼자 우리의 미래를 그렸던 내가 한심해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친다고 와르르 무너져버릴 정도로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다음에 쌓을 돌을 준비했던 내가 불쌍해서 미쳐버릴  같았다. 남들은 오래오래 잘만 만나는데   나만  하나,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자책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팠다.  사람이 혼자서 이별을 척척 받아들이는 동안 나는 이별했던 그때  자리에 주저앉아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나 되게 별로구나. 이별 한 번에 송두리째 휘청이는 약해빠진 멍청이구나, 하고. 근데 그건 내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울적한 마음과 하루 종일 싸우느라 힘들었어도 기어이 이를 악물고 운동하러 나갔고,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을 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때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고, 내가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나한테 편지를 썼다. 나를 미워하는 데에 쓰려던 힘을 티끌까지 남김없이 끌어모아, 그 힘으로 뭐라도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거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고맙게도 정신없이 흘러줬다. 그가 생각나는 날보다 생각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눈물이 마른 후였고 거울 속 나는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웃고 있었다. 온전하게 내가 만든 내 진짜 웃음이었다.



나를 깎아내렸던 그 바보 같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흘렸던 눈물이 우스울 정도로 내가 멋진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난 사랑 없이도 두 발로 꼿꼿이 땅을 딛고서 씩씩하게 서있을 수 있는 어른이었다.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줄 아는 어른. 끔찍한 시련도 내 힘으로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른. 내가 못난 게 아니라 그때 그 사랑이 내 그릇을 채우기에는 너무 부족했던 거라는 사실과, 내 그릇을 예쁘게 채워줄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것도 그때 쯔음 알게 됐다.


올해가 나는 정말 최악의 해인 줄 알았다. 전부라고 여겼던 사랑을 잃었으니까. 근데 이제 아니다. 사랑 없이도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사랑 따위가 내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사랑을 잃은 덕분에 나는 나를 다시 되찾았고, 그래서 올해가 손에 꼽는 멋진 해가 될 것 같다. 확신 없는 표정으로 눈을 피했던 너에게, 이제 그만 우리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강단 있게 말했던 그날의 내가 너무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지옥이지만, 지독한 아픔은 더 깊은 사랑을 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게 아니다.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아직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그랬다. 지나간 시간은 흘려보내야 한다고. 그래야 그릇이 비워져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거라고. 난 지나가버린 시간을 잘 비워냈고, 그러고 나서야 내가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난 사랑을 잃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씩씩하게 다음 사랑을 준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여주인공이었다.


왜 몰랐을까, 바보같이. 나 이렇게 멋진 사람이었는데. 다시 헤어진 직후로 돌아간다면, 주저앉은 내게 꼭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이별일 뿐이야.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 너에겐 혼자서도 잘 해낼 힘이 있고, 그러므로 이 아픈 시기를 반드시 이겨낼 수 있어. 너 진짜 강한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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