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강한 사람이야 반드시 이겨낼 거고 다시 사랑할 수 있어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이별의 슬픔에 하염없이 잠식되는 유형과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유형. 찼든 차였든 간에 나는 주로 전자에 속했다.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됐는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달라졌을지,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있을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텐 사랑이 전부였으니까. 내가 가진 걸 몽땅 다 잃는다고 해도 사랑만 있으면 아무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했던 사랑이 끝났으니 내 존재 이유가 통째로 흔들릴 수밖에. 머릿속은 온통 상실로 가득 찼고, 초점 없는 퀭한 눈과 기운 없는 몸뚱이로 마지못해 살아냈다. 어쩌다 간신히 기운을 차릴 새면 그 에너지를 눈물을 쏟는 데에 썼다. 미처 지우지 못한 사진을 다시 보고, 예전에 나눴던 카톡을 찾아 읽고, 헤어진 사람의 SNS에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스스로를 상실의 구렁텅이에 점점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그랬기에 이별 직후 내 삶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사랑이 저 멀리 달아나는 줄도 모르고 혼자 우리의 미래를 그렸던 내가 한심해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툭 친다고 와르르 무너져버릴 정도로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다음에 쌓을 돌을 준비했던 내가 불쌍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남들은 오래오래 잘만 만나는데 왜 또 나만 못 하나,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자책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팠다. 그 사람이 혼자서 이별을 척척 받아들이는 동안 나는 이별했던 그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나 되게 별로구나. 이별 한 번에 송두리째 휘청이는 약해빠진 멍청이구나, 하고. 근데 그건 내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울적한 마음과 하루 종일 싸우느라 힘들었어도 기어이 이를 악물고 운동하러 나갔고,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을 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때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고, 내가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나한테 편지를 썼다. 나를 미워하는 데에 쓰려던 힘을 티끌까지 남김없이 끌어모아, 그 힘으로 뭐라도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거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고맙게도 정신없이 흘러줬다. 그가 생각나는 날보다 생각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눈물이 마른 후였고 거울 속 나는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웃고 있었다. 온전하게 내가 만든 내 진짜 웃음이었다.
나를 깎아내렸던 그 바보 같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흘렸던 눈물이 우스울 정도로 내가 멋진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난 사랑 없이도 두 발로 꼿꼿이 땅을 딛고서 씩씩하게 서있을 수 있는 어른이었다.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줄 아는 어른. 끔찍한 시련도 내 힘으로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른. 내가 못난 게 아니라 그때 그 사랑이 내 그릇을 채우기에는 너무 부족했던 거라는 사실과, 내 그릇을 예쁘게 채워줄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것도 그때 쯔음 알게 됐다.
올해가 나는 정말 최악의 해인 줄 알았다. 전부라고 여겼던 사랑을 잃었으니까. 근데 이제 아니다. 사랑 없이도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사랑 따위가 내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사랑을 잃은 덕분에 나는 나를 다시 되찾았고, 그래서 올해가 손에 꼽는 멋진 해가 될 것 같다. 확신 없는 표정으로 눈을 피했던 너에게, 이제 그만 우리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강단 있게 말했던 그날의 내가 너무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지옥이지만, 지독한 아픔은 더 깊은 사랑을 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게 아니다.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아직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그랬다. 지나간 시간은 흘려보내야 한다고. 그래야 그릇이 비워져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거라고. 난 지나가버린 시간을 잘 비워냈고, 그러고 나서야 내가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난 사랑을 잃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씩씩하게 다음 사랑을 준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여주인공이었다.
왜 몰랐을까, 바보같이. 나 이렇게 멋진 사람이었는데. 다시 헤어진 직후로 돌아간다면, 주저앉은 내게 꼭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이별일 뿐이야.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 너에겐 혼자서도 잘 해낼 힘이 있고, 그러므로 이 아픈 시기를 반드시 이겨낼 수 있어. 너 진짜 강한 사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