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립밤 4종
마스크와 함께한 근 2년 동안 감기환자가 줄었다는 기사를 봤다. 의외의 이점이다. 주위의 어떤 이는 마스크 덕에 입술 뜯는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하고, 어떤 이는 마스크 안 습도 덕에 콧속이 건조해지지 않는 이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작은 마스크 속 세상은 자연재해 현장이 따로 없다. 태어나길 얼굴, 특히 인중에 땀샘이 몰빵 되어있는지라 짠기 가득한 땀이 입술로 줄줄 흐른다. 그럼 입술이 수분기가 쫙 빠져 버쩍버쩍 마르기 시작하고 거기에 혀로 입술을 축이는 버릇으로 침독을 보탠다. 하루 끝 즈음, 입 주변까지 화닥화닥거리는 벌건 입술이 완성된다.
매일매일 입술을 염장하고 있지만 다행히 아직 입술이 찢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아무래도 보이는 곳마다 립밤을 두는 것이 효과를 거둔 듯. 건조인간 김작자는 이곳저곳 립밤을 뿌려놓고 사용한다. 침대 옆에도, 책상 위에도, 사무실 컴퓨터 앞에도,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한 개씩 던져놓으면 어느새 싹싹 긁어 쓴 빈 통만 남는다.
그래, 빈 통이 남는다. 다행히 립밤만큼은 캔과 종이류로 분리수거할 수 있다. 화장품 플라스틱 굴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지만 적어도 립밤은 선택지가 꽤 있고 도전해봄 직하다. 오늘은 립밤 100개는 더 써봤을 김작자가 이곳저곳 던져놓은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립밤들을 모아 보여주겠다.
(참고로 뉴트로지* 립밤은 줘도 안 쓰고, 끈적끈적하거나 묽어서 먹으면 바로 사라지는 애들은 안 쓴다. 딱딱한 스틱 타입으로 입술에서 부드럽게 안 밀리고 뻐득뻐득 거리는 애들도 싫어한다.)
틴케이스 + 필름포장
12g / 7,000원 / 바로가기
이 립밤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날 밤 바르고 자면 아침에 각질이 퉁퉁 불어 손으로 살살 밀기만 해도 매끈한 입술이 된다던 전설의 아이템이다. 잊고 살다가 스킨푸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제일 먼저 생각나 냉큼 집어왔다.
옛날에는 양각으로 로고가 새겨진 금빛 케이스였는데 이제는 카키색에 심플하게 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다. 그래도 틴케이스인 건 변함없다. 스킨푸드의 과도기 시절 충격적이게도 커다란 아보카도 모양 플라스틱에 담겨 나오기도 했다. 마음 고쳐먹고 다시 틴케이스로 내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버터크림 같은 제형이라 번들거림이나 끈적임은 전혀 없다. 겨울이 되면 건조해지는 입술 주위까지 벅벅 발라도 튀김 먹다 들킨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수분크림을 듬뿍 바른 느낌. 보습력이 확실히 짱짱하다. 혀로 입술을 축일 때도 잘 벗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두고 자기 전에 바르는 립밤으로 사용하는 중.
아쉬운 건 비닐 필름포장이 되어 나온다. 그럼에도 요 제품은 접근성이 높아 1등으로 소개한다. 직접 써보고, 택배 포장 없이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줬다. 로드샵이 전체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지만 아직 전국에 30여 곳의 스킨푸드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틴케이스 + 종이 단상자
13g / 9,000원 / 바로가기
선택지는 요즘 ‘고체’에 대한 관심이 커져 이것저것 샘플을 받아보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 톤 28의 립밤. 써보지 않은 화장품에 대한 경계가 높은지라 이 립밤 주위를 계속 어슬렁거렸다. 빤히 쳐다보다가,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길 몇 번. 결국 내돈내산이 돼버렸다.
빤딱한 윤이 나는 심플한 틴케이스. 그에 비해 단상자는 조금 크지 않나? 했는데 USDA 유기농 카카오를 사용해 VEGAN인증까지 받은 립밤이라는 장점과 제품 정보를 빽빽하게 담느라 꾀나 고생한 사이즈다.
내가 구입한 건 L2 무향. L1 바닐라향은 코코넛 향 베이스라, 코코넛이 조금 들어간 칵테일도 안 마시는 나는 패스했다. L2는 완전한 무향은 아니고 코를 박고 있으면 은은하게 해바라기씨 냄새가 난다. 알고 보니 실제로 해바라기씨 오일이 들어간다. 나름 개코다.
이 립밤은 사무실 모니터 앞에 두고 수시로 바른다. 손으로 누르면 덩어리가 딸려와 녹여 발라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딱딱하다. 약지로 몇 번 문지르면 얇고 촉촉한 오일이 녹아난다. 입술끼리 문지르면 매끈매끈 딱 기분 좋은 기름기. 천연 원료로만 만들었다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용감이 좋다. 자신 있게 추천한다.
종이 용기
10g / 13,900원 / 바로가기
사무실이 제로 웨이스트 샵 근처에 위치한 행운으로 심심하면 놀러 가 새로 들어온 제품을 구경하곤 하는데 (매일 봐도 재밌다.) 계속 눈에 들어왔던 멀티밤. 조금 비싼 감이 있어 계속 알짱거리기만 하다 급 추워진 날씨에 바짝 건조해진 몸이 알아서 결제했다.
모나쥬 멀티밤은 종이로 된 스틱 타입으로 매일 밤-데일리, 편한밤-극건성, 라움밤-컬러립밤 이렇게 총 3종이고 나는 극건성이므로 편한밤을 선택했다.
보들보들한 질감의 종이 용기에는 멸종위기종 동물들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매일 마주 보면 멸종위기 동물을 한번 더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흥미롭게 느낀 건 뚜껑 안에 토마토 씨앗이 숨어있다는 사실! 종이 안에서 토마토 씨앗이 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6개월 후 봄이 되면 뚜껑째 심어볼 테다.
모나쥬 멀티밤은 따로 단상자도 미개봉 씰도 없다. 이 점이 아주 백점만점이다. 대신 뚜껑이 조오금 헐거운감이 있다. 무지막지하게 흔들면 쬐끔 들린다. 그렇다고 뚜껑이 아예 날아가진 않는데 오래 사용하거나 겨울 외투에서 굴러다니다 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향은 거의 없다.
개봉하면 용기에 담은 모양새로 그대로 굳어있는 밤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살살 손으로 녹여 발라주는 게 좋다. 바로 입에 발랐다간 다 뭉그러질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일단 조심조심. 편한밤은 손을 대기만 해도 스르륵 녹는 부드러운 제형이다. 입구도 넓은 편이라 입술에 바로 문지르면 엄청 많이 발린다. 추운 날 꽁꽁 얼어붙은 립밤을 녹여 바를 일은 없겠다.
입술에 바르면 ‘아, 립밤 발랐구나.’ 싶을 정도의 윤기인데 몸 피부에 바르면 피부가 반짝반짝거린다. 얇은 보디 오일 바른 윤기와 사용감이다. 그래도 겨울에 헐어버린 코 주위에 바르는 연고보다는 덜 반짝거리므로 통과.
종이 용기 + 사탕수수 종이 단상자
10ml / 9,900원 /바로가기
샘크래프트의 립밤은 제로 웨이스트 커뮤니티에서 종이 용기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며 제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겨울철 주머니나 따듯한 실내에서 밤이 녹아 생기는 문제였다. 특히 밤이 녹았다 굳었다를 반복하는 입구 쪽 종이가 젖는 것.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입구 쪽에 비즈왁스로 한번 코팅되어있다. 다른 얼룩이 아니니 안심할 것.
샘크래프트도 따로 미개봉 씰은 없고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비목재 종이 단상자에 담겨있다. 종이 용기 립밤은 하단을 밀어 올려 사용하는데 모나쥬보다는 뻑뻑하게 올라간다. 다시 내릴 땐 바닥에 쿵쿵 내려치면 가라앉는데 아주 쾅콰콰쾅 쳐야지 내려간다. 처음엔 불편할지 몰라도 쓰다가 헐거워져 바를 때마다 스르륵 내려가버릴 일은 없겠다.
오늘 소개한 립밤 중에 제일 도톰한 제형이다. 두께감이 느껴지는 바디 버터를 바른 듯 보습막이 느껴진다. 입술에 둥둥 떠있는 건 아니고 착 붙긴 하는데 웬만하면 벗겨지지 않는다. (카메라로 아무리 찍어도 전혀 표현이 안되니 너무 아쉽다.) 몸에 바르고 손으로 박박 문질러도 보습막이 남아있어서 건조해서 벗겨지는 피부 혹은 입술을 자주 먹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향은 뜨끈뜨끈한 버터크림에 시트러스인지 복숭아인지 달짝지근한 오일이 갇혀있는...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우선 나는 선호하지 않는 향인데 지인턴은 문방구 레몬사탕 냄새라고 했다.
종이 용기 립밤은 용기의 여타 스틱 타입 립밤보다 조금 통통한 편. 물론 비교군이 립밤중에서도 작은 버츠비지만 유리아*같은 립밤보다도 조금 큰 사이즈다.
사용해 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립밤들이라 아직은 멀쩡한 외관을 자랑 중. 겨울이 지나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체온이 높아서인지 기존의 스틱 타입 립밤들도 뜨끈한 겨울 외투 주머니에서 슬쩍 녹는 모습을 자주 보았으므로 종이 용기를 고민했다. 용기를 종이로 만들 만큼이면 성분은 더더욱 심플하고 천연재료다 보니 더 잘 녹지 않을까, 사실 아직도 조금 걱정된다.
맘 편히 들고 다니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요 정도 불편은 감수하고 쓰는 거니까. 집에 두고 쓰지 뭐! 오래오래 튼튼할 필요가 있나, 개봉 후 사용기한만큼만 버텨주면 합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