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체 향수 리뷰
바쁜 출퇴근 길. 흔들리는 지하철 안 두 다리로 중심을 잡으며 핸드폰에 빠져있을 때 문득 코 끝에 스치는 향수 냄새. 옆에 서는 사람에 따라 그 향이 달라지는데 그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향도 있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게 하는 향도 있다. 평소에 귀찮아서 향수를 자주 뿌리는 편은 아니지만 좋은 향수 냄새를 맡으면 ‘나도 내일은 꼭 뿌려야지!’라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막상 다음 날이 되면 촉박한 준비시간에 향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거나 까먹고 만다. 이러한 이유로 공병에 향수를 담아 들고 다닌 적도 있지만 귀찮음은 내 생각보다 더 강했다. 게다가 리필까지 해줘야 하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장식품이 돼버린 향수가 몇 개인지……)
그래서 한때 휴대하기 좋은 고체 향수를 쓰게 됐었는데 그때 썼던 게 로즈향의 록시땅 솔리드 퍼퓸이었다. (지금은 단종됐다.) 작고 휴대하기 좋아 자주 쓰는 가방에 넣어 놓고 생각날 때마다 손목이나 귀 뒤에 바르곤 했다. 하지만 향이 완전히 내 취향인 건 아니라 일반 병 향수로 돌아가게 됐는데 역시나 자주 뿌리지 않고 또다시 장식품이 돼버렸다.
이렇듯 귀찮음이 많은 나는 고체 향수가 정답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고체 향수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향수에 소홀했던 몇 년 사이 여러 브랜드의 고체 향수가 시중에 판매되고 있었다. 그중에 내 눈길을 끈 종이 용기로 된 스틱 타입과 틴케이스 타입의 고체 향수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가격: 12,000원 / 10ml / 바로가기
향: 멜로우 가든, 이그제틱 부쉬, 디어 프리지아 외 2개
지속력: 4-5시간
포장: 종이용기+사탕수수 종이상자 / 택배: 종이상자+종이완충재
샘크래프트는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브랜드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이 용기 고체 향수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가벼운 스틱 타입이라 바르기 아주 편하다. 보통 고체 타입 향수는 자 타입(단지 형)이 많아 손가락으로 문질러 피부에 발라야 하는데 밖에서 바를 때는 이것저것 만진 손으로 문지르는 게 찝찝할 때도 있고 손 끝에 남는 잔여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위생이 신경 쓰이는 사람에겐 스틱 타입의 고체 향수가 훨씬 만족감을 줄 것이다.
샘크래프트 퍼퓸밤은 종이로 만들어진 용기이기 때문에 일반 플라스틱 스틱 용기처럼 돌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밑 부분을 주사기처럼 눌러서 사용해야 한다. 혹 실수로 푹 눌러 내용물이 많이 나왔다면 당황하지 말고 바닥 면을 바닥에 톡톡 쳐서 내려주면 된다. 또 용기에 얼룩처럼 색이 진한 부분이 있는데 밀랍으로 코팅한 것이기에 안심하고 사용해도 된다.
추천 계절: 봄, 가을, 겨울
"매력적이고 풍부한 플로럴 향과 반짝거리는 아침이슬, 그리고 청초한 풀냄새"
멜로우 가든은 세 개의 향 중 가장 호불호 없이 좋아할 향이란 생각이 든다. 포근하고 달달한 향이 마치 따뜻한 온실 속 정원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쥬시후레쉬 껌 향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실 마냥 단 향은 좋아하지 않는데 멜로우 가든은 마냥 달콤한 향이 아닌 끝에 살짝 느껴지는 싱그러운 향기가 자칫하면 질릴 수 있는 향을 특별하게 해 준다.
*향 정보
-매력적이고 풍부한 플로럴(장미, 제라늄, 프리지아, 클라리 세이지, 시클라멘)
-아침이슬의 반짝거림(루바브, 튤립, 팔마로사, 네롤리)
-청초한 풀냄새(베티버, 라벤더, 벤조인)
추천 계절: 가을, 겨울
“싱그러운 꽃, 농익은 과일과 스파이시한 우드향이 어우러진 이국의 정취”
나의 원픽인 이그제틱 부쉬! 너무 달지 않은 로즈향에 스파이시한 페퍼향이 더해진 향은 내 취향을 완전히 저격했다. 가장 좋아하는 향수가 끌로에의 오 드 퍼퓸인데 로즈와 머스크, 약간의 스파이시한 향이 어우러진 향이다. 이런 계열의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그제틱 부쉬 또한 마음에 들 것이다. 멀리서 맡으면 스파이시한 향이 강하고 가까이서 맡으면 로즈향이 짙어지는 매력적인 향이다. 멜로우 가든이 따뜻하고 청순한 느낌이었다면 이그제틱 부쉬는 시크하고 세련된 느낌이랄까.
*향 정보
-싱그러운 꽃향(불가리안 로즈, 로즈 제라늄)
-농익은 과일의 달콤함(오렌지, 메이창, 실론 시나몬)
-스파이시한 우드(파인, 블랙 페퍼, 진저)
추천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우아한 공단 리본이 둘러진 들꽃과 프리지아의 풍성하고 사랑스러운 부케향"
세 가지 향 중 가장 꽃 향기에 가까운 디어 프리지아. 시트러스 계열의 향을 바탕으로 커다란 꽃다발에 약간의 우디 향과 시큼한 레몬향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향기이다. 마냥 싱그럽고 가벼운 향 같다가도 우디 향이 가벼움을 잡아주어 한 층 더 매력 있는 향으로 만들어준다. 달콤함과 스파이시한 향의 중간을 찾고 싶다면 디어 프리지아가 딱이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건 위에 두 개 향들과는 달리 잔향에 알코올 향이 조금 남는다는 점.
*향 정보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리본(클라리 세이지, 샌달우드, 패츌리)
-풍성한 들꽃 부쉬(베르가못, 제라늄, 캐모마일)
-프리지아(프리지아, 페어)
가격: 15,000원 / 15g / 바로가기
향: 오아인 그린 외 11개
지속력: 약 4시간
포장: 틴케이스+종이상자+유산지 / 택배: 종이 상자+비닐 뽁뽁이
고체 향수를 찾다가 알게 된 브랜드인 오아인.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고체 향수를 제작하는 것으로도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오아인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천연재료 사용 및 100% 핸드메이드 제품으로 고체 향수 경우에도 주문제작 상품이기 때문에 주문 후 단순변심 환불이 어렵다고 하니 이 점 참고할 것!
추천 계절: 봄, 여름
"초록 정원의 바람, 싱그러운 향"
12가지나 되는 향 종류에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오아인 그린 향. 브랜드 이름이 들어간 이 향은 오아인의 시그니쳐 향이다. 가장 인기 있는 향으로 홈페이지의 설명대로 정말 싱그러운 향기가 물씬 풍긴다.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바로 그 향이다. 이 향을 봄이나 여름에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들 정도로 싱그럽다. 물론 가을, 겨울에도 나쁘진 않다. 첫 향이 꽃집 향기라면 잔향은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은은한 비누 향기가 나서 추운 계절에도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추천 계절은 봄, 여름!
*향 정보
오아인의 시그니쳐 향으로 플라워 가든을 걷고 있는 듯 싱그러운 풀내음과 자연 그대로의 향을 느낄 수 있으며 플라워 샵을 연상시키는 향은 특히 힐링 아이템으로 기분 전환에 좋습니다. 4계절 꾸준히 구매가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입니다.
가격: 28,000원 / 15g / 바로가기
향: 시그니쳐 외 2개
지속력: 4-5시간
포장: 틴케이스+비닐+천케이스 / 택배: 종이상자+비닐 뽁뽁이
태국에서 유명하다는 스파 브랜드 탄. 친환경 재료를 사용한다는데 그중 핵심 재료가 쌀겨 오일과 탄에서 최초로 사용한 차조기(shiso)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체 향수에도 쌀겨 오일이 들어있다. 또 탄에서는 아동노동과 동물 실험 반대 등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오아인과 마찬가지로 틴 케이스에 들어있는 탄의 고체 향수는 역시나 가볍고 휴대성이 좋다. 2만 원 후반대의 가격이라 그런지 케이스도 다른 틴케이스보다 고급스러워 보이고 전용 천 케이스까지 준다. 사실 예전에 나였다면 추가 구성품에 혹했을 테지만, 지금은 ‘저런 거 안 줘도 되는데’라고 사양하게 된다. 어차피 나중에 이리저리 굴러다닐 걸 알기에. (친환경 브랜드라며!)
추천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페퍼 민트보다 달콤한 향인 스피아민트와 오렌지의 상큼한 향"
매우 기대했던 탄의 시그니처 향은 내게는 살짝 낯선 이국적인 향으로 느껴졌다. 계속 맡다 보니 낯선 향 가운데 익숙한 향기가 나서 도대체 이게 무슨 향일까 싶었는데 오이비누와 살구비누를 합친 향이었다. 두 비누가 상큼한 계열이었다면, 탄의 시그니처는 상큼함보다는 묵직하고 이국적인 오이, 살구 비누를 합친 향이다. 처음에는 이 향이 진하게 나다가 시간이 지나면 흡사 목욕탕에 비치된 하얀색의 비누냄새가 남는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향은 나에게 아쉬움을 남겼지만 향은 워낙 호불호가 강하니 누군가에게는 베스트이길 바란다.
*향 정보
박하향의 시원하지만 달콤한 스피아민트와 오렌지의 상큼한 향이 어우러진 향
며칠간 사용해 본 고체 향수. 내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장점은 가벼움이었다. 한 때 친구들이 무기를 들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이것저것 싸들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가방이 무거우면 조금만 걸어도 금방 지친다. 그래서 가방에는 최대한 아무것도 넣지 않으려고 하는데 고체 향수는 보통 립밤 무게 정도로 가방에 한 개 더 넣는다고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말할 필요 없는 휴대성. 제일 자주 쓰는 가방에 한 개만 넣어 놓자.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도 안 쓰던 향수를 3-4번이나 쓰게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실 나같이 귀찮음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향수 한 병을 다 쓰는 것도, 쓴 향수병을 처리하는 것도 어렵다. 공구를 이용해 향수 마개를 분리하고, 신문지나 휴지에 남은 향수를 붓고. 과연 이런 과정을 통해 올바르게 향수병을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방 선반에도 유통기한이 한 참 지난 처치곤란 향수병들이 늘어서 있다. 처음에는 그저 향이 좋고 병이 예뻐서 사게 된 향수는 후처리라는 과제를 남겨준다. 고체 향수가 이 과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아니더라도 근접한 답 정도는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