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택지 Nov 01. 2021

반려균 입양기

비전화 퇴비함 만들기

난 과일 깎고 난 껍질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 이거 버리려고 비닐을 써야 하다니 너무 아깝지 않나? 이 껍질들 분명 방금까지 과일이었는데, 이젠 음식물쓰레기라니... 과일이었던 껍질은 왠지 불쌍하고 비닐은 아깝기 그지없다. 본가에서는 이런 껍질들을 채반에 펼쳐 꼬들꼬들 말려두었다가 주차장 한편의 작은 화단에 꽝꽝 묻으러 갔는데! 할머니 집에서도 그랬고 시골집에도 그랬다. 시골은 말릴 필요도 없지, 뒷밭에 후루룩 뿌려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땅만큼 비싼 게 없는 서울 땅에서 음식물쓰레기를 묻을 땅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꾸덕꾸덕 말려 버리는 일도 베란다가 없으니 택도 없다. 벌레를 부르는 의식이 아닌 이상에야. 

@비전화 방식의 음식물 퇴비함을 쓰면서 생기는 고민과 이야기를 기록하는 프로젝트 '반려균'

그러다 비전화 방식의 퇴비함을 알게 됐다. 스티로폼 박스와 배양토만 있으면 과일, 야채 껍질쯤은 미생물이 알아서 2주 안에 퇴비로 만들어 준단다. 유튜브에서 보고 기웃거리던 몇십만 원짜리 미생물 음식물처리기는 이제 나의 위시리스트에서 삭제다. 돈과 전기 그리고 고장 걱정 없는 작은 땅이 생겼으니까.


boomfemi.github.io/companion-microbes 반려균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퇴비함 사용방법


우선 퇴비함의 원리는 이렇다. 공기가 통하는 작은 상자에 흙을 넣고 음식물을 넣고 매일 뒤섞어주면 안에 있던 미생물들이 신나게 번식해 음식물을 분해해 다 흙으로 돌아가게 하여 좋은 퇴비가 된다는 것.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가 아니라 파뿌리가 흙이 될 때까지 함께할 반려균을 키우는 것이다.


우선 준비물은 흙. 뒷산 혹은 화단에서 퍼오면 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봤으나 자연의 흙 속에는 작은 벌레나 곤충들의 알, 유충이 있을 수 있단다. 그게 바퀴벌레일수도 있고.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므로 얌전히 동네 꽃집에서 배양토를 구입했다. 배양토는 이미 살균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벌레 걱정 없이 쓸 수 있다.


다음은 공기가 통하는 작은 상자. 제일 추천하는 건 항아리나 토분. 소재 자체가 숨을 쉬기 때문에 따로 구멍 내줄 필요가 없다. 며칠간 당근에서 항아리를 찾고 있었으나 운명적으로 배양토를 사가는 길에 스티로폼 박스를 만났다. 스티로폼 박스는 가볍고 딱 맞는 뚜껑도 있는 데다가 숨구멍을 내주기도 편해 추천하는 상자다. 신나서 묶여있던 끈을 풀고 크기가 적당해 보이는 놈으로 챙겼다. 어릴 땐 참 부끄럼쟁이였는데, 이런 것쯤 아무렇지 않은 멋진 으른이 되었다.


난 이제 주워온 스티로폼 박스 집도에 들어간다. 뚜껑에 구멍을 내고 양파망 등 공기가 통하는 소재로 막아주면 된다. 양파망을 추천하나 나는 망가진 빨래망으로 대체했다. 벌레가 들어갈까 망으로 마감하는 것이므로 테이프로 꽁꽁 막기를... 대충 압정으로 눌러 박았다가 날파리 배양할뻔했다.


자, 준비는 끝났고 이제 2주간 음식물 쓰레기를 넣어주면 되는데... 설거지 후 금방 걸러내 물기 가득한 거름망을 턱턱 쏟아내기엔 나는 알아주는 겁쟁이다. 혹시 모를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 미리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놨다. 사과, 귤, 고구마를 먹고 남은 껍질들을 따로 그릇에 모아 냉장고에 넣어 반건조 상태를 만들었다. 그대로 넣어도 좋지만 잘게 잘라 넣으면 더 빨리 분해된다. 냉장고에서 말라비틀어진 파도 댕강댕강 잘라 넣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고기나 생선 같은 육류는 안된다. 뼈도 안된다. 요만큼의 흙에게 바라기엔 너무 벅찬 일이다. 부패로 인한 냄새도 장담할 수 없으니 식물만 넣자. 아, 계란 껍데기는 된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나 잘게 부수어서 넣으면 영양만점 비료가 될 수 있다. 


이제 매일 한 번씩 주걱으로 열심히 뒤적거려주면 된다. 모종삽을 쓰면 섞기는 더 편하겠지만 스티로폼을 확 긁어낼 수도 있다. 나는 기다란 나무주걱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1일 1 섞어주기를 잊지 않도록 어디서든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주고 주걱도 위에 가지런히 올려뒀다. 이 방법 괜찮다. 일단 주걱이 눈에 보이면 잡아들게 된다.



그렇게 이튿날 곰팡이를 만났다. 내가 뭘 잘 못했나? 싶어 놀랐지만 찾아보니 원인은 껍질들에 있던 습기 때문이고, 흰 곰팡이는 괜찮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때부턴 꼼꼼히 바닥까지 열심히 잘 섞어줬다. 다행히 그 후론 곰팡이는 생기지 않았다. 매일 음식물을 넣을 때는 물기가 더 많을 수도 있으나 통풍에만 신경 써주면 문제없다고 한다. 


알록달록 하던 나머지 껍질들은 일주일 정도 되니 신기하게도 거의 다 사라졌다. 파 빼고. 파는 고대로 흙에 심어만 놔도 잘 자란다더니... 파릇파릇한 것 보니 끄떡없다. 파는 2주간 잘 묵혀놓아야겠다.


잔뜩 쫄아서 시도한 퇴비함은 생각 외로 정말 안전했다. 일단 냄새라곤 흙을 뒤섞어줄 때 나는 은은한 귤껍질 향 뿐 우리가 아는 그 흙냄새이고 벌레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껍질들을 미리 조금 말렸기 때문인지 흙이 질척해지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수분이 조금 부족해 보일 정도... 다음부턴 부러 말리지 않고 섞어줘도 좋겠다.  


인터넷으로 식물 배송 한번 시켜보고 포장재에 식겁해 이젠 동네 꽃집에서 골라 손에 덜렁 쥐고 온다.

그럼 만들어진 비료는 어떡하느냐. 식물 집사가 되고 싶은 식물 킬러인 나는 직접 만든 비료로 레벨업을 해볼 생각이다. 반려균 주인장 꼬리님은 뒷산에 탈탈 털어주신다는데, 게릴라 비료 투척이라니 너무 멋있잖아. 전 산에 올라갈 힘이 없으니 여러분이 도전해주세요!

 

*버튼 고사리는 음지에서 키워야 합니다.

테스트가 끝났으니 이젠 정식으로 반려균을 키우려고 한다. 우선, 총 기간 4주. 반려균 키우기의 정석은 아래와 같다. 


구해 온 첫 번째 스티로폼 박스에 음식물 쓰레기를 넣어가며 2주간 매일 잘 섞어준다. 여기서 2주는 배양토와 음식물의 비율이 3:1이 되는 기간을 임의로 정한 것으로 각자 배출하는 음식물 양을 기준으로 흙의 양을 조절하자. 

이제 두 번째 스티로폼 박스를 구해 똑같이 준비한다. 두 번째 박스에 2주간 음식물을 넣고 섞어주면서 첫 번째 박스의 흙을 섞어주는 일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4주가 지나고, 첫 번째 박스의 흙과 음식물은 어엿한 비료가 된다. 완성된 비료는 따로 비워내고 박스에 다시 배양토를 넣어주고 위와 같이 반복한다. 


이제 곧 전기장판 위에서 귤 한 바구니씩은 거뜬히 비울 계절인데, 귤껍질로 퇴비함 만들기 어떤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