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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r 26. 2024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하다.

소설가의 첫 방송 출연 이야기

벌거벗은 세계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설가인 나를 섭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첫 방송의 기회였다. 기회를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실 그간 방송 섭외가 두 차례 있었다. EBS와 Mnet이었는데 각각 교양 여행 프로그램과 연애 프로그램이었다. 모두 미팅까지 갔지만 이것저것 조율하다가 흐지부지됐다. 전자는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후자는 오히려 안 되길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이번에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전공으로 문학이 아닌 역사를 택할 정도로 역사를 좋아했다. 작품으로도 역사 소설을 다섯 편이나 썼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


방송국에서 섭외 연락이 올 때면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다. 소설가를 꿈꾸기 시작한 건 십여 년 전, 데뷔작을 출간한 건 육 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인정을 받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소설가로 살아가고자 발버둥치듯 노력해왔다. 작품이 별로라는 이야기도 들으며 상처를 받기도 했고, 직접 첫 책을 들고 찾아갔는데 면전에서 수상 경력을 물어보며 거절한 독립서점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가는 평가 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임을 알았기에 상처뿐인 이야기도 겸허하게 인정하며 자양분으로 삼았다. 이제 6년차 소설가가 된 지금, 세상의 주류에서 러브콜이 오고 있었다. 그간의 노력에 이제서야 조금씩 햇살이 비춰오는 것만 같았다.


벌거벗은 세계사 작가님들과 미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방송 준비에 돌입했다. 주제는 프랑스의 항독역사인 <레지스탕스>편이었다. 나는 강연을 맡은 교수님의 저작 네 권과 더불어 일곱 편의 관련 논문을 탐독했다. 알차게 공부하고 싶었다. 내게 찾아온 기회를 허투로 쓰고 싶지 않았고, 방송 관계자들이 나를 섭외하며 염두에 두었을 기대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송에 나가서 어버버 거리기만 하고 온다면 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후회 없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어 열심히 공부를 했다. 물론 나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나는 프로그램의 메인이 아닌 감초 역할이었다. 훌륭한 조연이 되어보고 싶었다.



방송 촬영 현장


드디어 방송 촬영날이었다. 잠도 푹자고 전날에는 나름 관리도 한다고 안 하던 마스크팩도 했다. 기운차게 집을 나섰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한 날은 없는 것일까. 출발부터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테이크아웃 한 커피를 차에서 쏟고 만 것이었다. 바지도 젖었고 특히 조수석은 커피로 흥건해졌다. 대본까지 흠뻑 젖고 말았다. 출발부터 지연되고 말았다. 편의점에서 수건과 휴지, 물티슈를 사서 응급처치를 했고 근처 인쇄소에 들러 다시 대본을 인쇄했다. 다행히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바지도 검은색이어서 커피 자국이 보이지 않았고, 일찍 출발한 덕분에 촬영에 늦지도 않았다.


방송국의 대기실에 도착했다. 코디님께서는 나의 착장을 보더니 갈아입으라며 준비해둔 옷을 건내주셨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너무 밝은 파스텔 톤의 옷들이었고, 니트 조끼까지 있었다. 평소에 나는 개인적으로 니트 조끼를 입지 않았다. 뭔가 약해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답고 강해보이는 옷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컬러도 블랙과 카키였다. 그래서 그렇게 입고 갔는데 예기치 못한 일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방송은 일종의 역할극이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 사항을 잘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막상 입고 스튜디오에 있으니 왜 화사한 옷을 주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내 자리는 규현님의 옆자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프로그램에서만 보던 은지원님과 이혜성님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신기하기만 했다. 그들과 쉬는시간 스몰톡을 나누기도 했는데, 특히 은지원님이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며 긴장도 풀어주셔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촬영은 5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맛있는 도시락도 준비해주었지만 나는 식사를 걸렀다. 행여나 속이 부대끼거나 할 경우가 생길까 걱정이 들어서였다. 이렇게 촬영에 몰입하다보니 수많은 카메라도, 지켜보는 제작진의 존재도 잊은 채 방송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마 준비했던 열정은 아낌없이 쏟아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첫 방송, 벌거벗은 세계사 촬영은 끝이났다. 방송 촬영 덕분에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하며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 연예인들도 만나고 함께 프로그램도 만들었으니 개인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소설가인 나를 필요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삶의 의미를 새롭게 느껴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부단하게 노력하다보면 세상은 언젠가 나를 인정해준다. 앞으로 더 열심히 정진하고 싶어졌다. 작품으로도 한 존재로도 세상과 싱그럽게 소통하는 소설가로 나아가고 싶어졌다.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멋진 사람이 되어보자.




방송은 3월 26일, 오후 10시 10분입니다!




이웃 신청하고 소설가 이우의 재미있는 포스팅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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