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취식자의 생활상 2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려 창문 너머로 물이 많이 넘어왔다. 한 시간을 쪼그려 앉아 걸레로 물을 훔쳐냈다. 이모가 카페를 운영하신 지 약 4년 정도 되셨으니 이 건물은 아무리 못해도 그것보단 더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하나둘씩 고장 날 때가 되었다. 건물도 나이가 든다. 때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일도 있어야 한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카페에 손님이 별로 없다. 커피를 두어 잔 팔고 하루 종일 놀았다. 나중에 백발이 성성해지면 외진 곳에 카페를 차리고 하루 종일 놀테다. 최고의 노후생활은 카페 사장임이 틀림없다.
발한동 마가의 다락방은 아침 10시가 되면 카페를 오픈한다. 비가 밤새 온 날과 같은 이벤트를 제외하면 루틴처럼 정해진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포스기를 켜고 배너를 바깥에 들어 옮긴다. 전날 말려둔 사용한 원두가루를 치우고 테이블을 행주로 훔친다. 매장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면 출입구 팻말을 CLOSE에서 OPEN으로 돌린다. 화단에 물까지 꼼꼼히 다 주고 나면 하루의 시작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진입한다.
그것은 사운드트랙 고르기다.
어떤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인가.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재즈로 시작인가. 존경하는 김광석 선생님인가.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색깔 뚜렷한 블루스 어떨까. 아니면 김혜림과 이상은의 통통 튀는 곡조로 하루를 열어볼까. 아니다. 즐겨 듣는 인디밴드 창출의 앨범을 틀어버릴까. 에라이 장기하는 또 어떤가.
첫 곡의 느낌을 이어가는 방향으로 음악을 추천해서 재생하는 유튜브 뮤직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날의 첫 선곡은 아주 중요하다. 오늘 하루 매장의 색을 결정하는 중대사를 맡고 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늘은 동물원에서 시작해 신해철, 015B를 넘어 이문세로 가고 있다. 만족스럽다. 저녁에는 이모가 오셔서 선곡을 양보해 드린다. 이모는 사이먼 앤 가펑클이나 카펜터스 같은 올드팝을 즐기신다.
이제 카페는 완벽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어차피 11시 30분쯤이 되면 이른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첫 끼니는 바나나와 과일을 커피와 함께 먹는다. 커피는 롱블랙처럼 내려 마시는 걸 즐긴다. 커피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나오는 느낌의 여운이 깊은 진한 커피가 좋다.
내키면 몇 잔이든 쉽게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페는 정말 할만한 일이다. 어릴 적에 빵집 사장님이 꿈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이유는 갓 구운 빵을 잔뜩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손님이 찾아오는 때를 제외하면(있어도 음료가 나가고 나면) 앉아서 책을 본다. 많이 본다. 소설과 비소설, 경제 리포트를 번갈아가면서 읽으면 해가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읽을 수 있다. 커피와 같이 몰입해서 즐기다 보면 손님이 영영 들어오지 않았으면 싶을 때도 허다하다.
최근에는 무진기행을 포함한 김승옥 작가님의 단편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작가님은 빈곤하고 치열했던 당대의 현실적인 소재와 공간 속에서 다분히 한국적인 리듬으로 맛을 낸 멋진 단편소설들을 두루 쓰셨다. 시대를 고려해보면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묘사도 많았으니 그야말로 한국의 르네상스적 작가가 아니셨나 싶다.
한 편 한 편 넘어갈 때마다 소설이 끝나지 않길 바라면서도 특유의 텁텁하고 먹먹한 우울감이 올라와 어서 끝나버렸으면 하는 기분이 교차하며 들었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마음으로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어버렸다.
가끔 이렇게 좋은 작품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며칠은 아무것도 못하고 상념에 빠져 지낸다. 그게 이토록 밍기적대며 글을 쓰는 핑계라면 핑계다.
물론 아예 놀면서 지내지는 않는다. 반푼 어치긴 하지만 소소하게 주식투자를 해서 오고 가는 여비를 벌기도 한다. 시장과 산업의 공부는 나처럼 만물상 지식형 인간에게 아주 친화적이기 때문에 처음 주식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진입과 별개로 공부는 계속된다.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업들의 정보와 사업 아이디어들을 찾아보면서 그들의 사업과 그 사업의 구성원들을 생각한다. 작금의 상황을 보며 미래를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주식시장의 개장과 마감까지 나는 제한적으로 현실과 연결을 허락받는다. 사회인 깍두기 타이틀을 겨우 받은 셈이다.
그렇게 심심할 틈 없이 신명 나게 놀다가 몸이 찌뿌둥해지면 중간에 밖에 나가 햇빛과 바람을 맞으면서 멍도 때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카페 테이블 사이를 지그재그 걸어 다니기도 한다.
그러다 글이 가득 차면 이렇게 앉아서 글도 몇 자 써본다. 대개 실패하고 가끔 성공한다. 그마저도 다 해버리고 나면 에어컨과 커피 사이에서 체온의 튜닝을 잘 맞추고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휴식도 좋고 회복도 좋은데 이거 아주 제대로 한량이다.
저녁 열 시까지 위의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한다. 놀아보니 새삼 느끼는데, 잘 노는 것도 부단히 노력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많이 바쁘다.
마감을 마친 열 시 이후는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린 다음 운동을 한다. 평균 주 4회 정도 어시장을 지나 해안가를 따라 5km 남짓을 달린다. 수원에 있었을 때는 팔달산 산책로를 달렸었다. 산 중턱을 깎아 만든 산책로를 뛰다 해안가를 달리는 기분은 새롭다. 경사도 없이 매끈한 도로에 끊임없이 폐부로 바다 냄새가 들어온다. 비가 많이 온 다음날 파랑이 거칠면 파도가 넘어올 듯 달려드는 걸 보면서 달리기가 아주 즐겁다. 다 달리고 나서는 문고리를 잡고 턱걸이도 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며 근력운동을 한다.
단련의 시간이 끝나면 어김없이 바가지와 샤워를 하고 잠에 든다. 자기 전 수면 명상 유튜브를 매일같이 즐겨 듣는데 요즘에는 시그니처 도입부 음악만 들어도 잠이 오기 시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글은 아직 두 편밖에 쓰질 않았지만 내려온지는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매일 같은 일을 정성 들여서 반복한 지 한 달이나 된 것이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알바 경력 대략 10년 차. 잔뼈 굵은 잡일 처리 실력도 되찾고, 좋아하는 책을 정성 들여서 읽고 그 책을 다시 읽는 평화를 얻었으며, 운동의 기쁨 또한 되찾았다. 모두 다 우울증을 겪기 전부터 내가 보물처럼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다. 조각난 나 자신의 일부를 되찾았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내가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불안했던 첫날밤에 비해 내면이 조화롭고 편안하다. 여태껏 휴식의 강도에 집착했었는데, 사실은 빈도도 중요했나 보다. 나는 주기적으로 멈춰 서서 까지거나 다친 곳이 없는지 나 자신을 돌봐야 했던 것인가.
많은 생각이 든다.
복싱 광팬으로써 재미있게 봤던 영화 ‘사우스포’에서 모든 것을 잃고 재기하려는 복서 ‘빌리 호프’에게 처음부터 복싱을 다시 가르치는 스승 ‘틱’이 끊임없이 주문을 외듯 그에게 외치던 말이 있었다.
Protect yourself-!
복싱 특유의 투박한 멋도, 포효하는 제이크 질렌할의 멋진 근육도, 레이첼 맥아담스의 아름다움도 아닌 미트를 손에 끼고 구부정한 자세의 포레스트 휘태커가 시종일관 외치던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그 한 마디가 그 영화의 전부처럼 기억에 남는 건 그것이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한 주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고맙습니다. 미스터 틱.
이미 아는 일도 직접 겪어봐야 완벽하게 알 수 있다. 때로는 그 과정이 자신도 속일 만큼 천천히 흘러가서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제야 과정의 안에 있었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나는 지금 스스로를 아끼고 보호하는 방법을 직접 겪어보면서 배우고 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해가 쨍하게 뜨고 물기는 모두 말라 없어졌다. 손님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