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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쉉 Jan 15. 2019

미술 문외한의 전시 감상기 1

FOCUS KAZAKHSTAN-EURASIAN UTOPIA 전시회




 지난 주말 수원 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에 들려 포커스 카자흐스탄:유러피안 유토피아 전을 관람했다. 유라시아 민족의 미술을 처음 접해본 나에게 이 전시회는 시종일관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그 경험은 전혀 겪어본 적 없던 영감으로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전시회는 카자흐스탄의 풍경을 담은 유채화로 막을 열었다. 광활한 초원과 사막 그리고 깎아지른 산맥들을 삶의 배경으로 둔 덕일까. 압도적인 풍경화들은 전시관의 초입에서부터 발을 묶어두기에 매우 충분했다. 이국적인 세련됨을 자랑하는 첫 전시관에서의 유채화를 지나 다양한 그림과 조형물, 설치미술을 천천히 감상하며 현대미술까지 나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알 수 없는 동정심이 계속 일어났고, 나는 탐탁지 않은 감정으로 애써 외면한 채 감상에 몰두하려 노력했다. 동정심은 효과가 아주 좋은 환각과 같아서 정확한 감상을 방해하기 일수기 때문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어떤 편견도 없이 그저 작품을 지긋이 감상하려 노력했다. 완벽하게 지우지 못한 동정은 나중에 전시실을 나왔을 때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와 문화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되어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나라이길래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중앙아시아의 거인' 카자흐스탄. 한반도의 열두 배 가까이 되는 국토를 가지고도 인구가 1800만(2017년 기준)밖에 되지 않는 나라. 카자흐스탄은 투르크어로 '자유인의 나라'또는 '방랑자의 땅'이다. 나라 이름과 같이 유목민족에서부터 시작된 근본 덕분에 사람들의 성격은 전체적으로 호탕하다. 호탕함 속에 묻어있는 자상함은 또 새롭다. 다양한 소수민족과 함께 뒤섞여 지내면서도 여태껏 큰 내전이나 민족분쟁 한 번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실크로드와 드넓은 초원의 품에 안긴 유목민의 교집합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교류를 일구었고 그 유산이 지금의 따뜻한 사회상을 낳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과는 달리 카자흐스탄은 구소련의 통치 하에 있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주변 약소국인 카자흐스탄은 등 떠밀듯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다. 공산체제 아래의 많은 국가의 케이스를 살펴봤을 때 카자흐스탄의 생활상은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나날의 이 되었을 것이다. 스탈린의 사후, 유라시아 전체에 해방의 물결이 일면서 카자흐스탄은 마침내 1991년 12월에 자주국가로 독립하게 되어 자유를 손에 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뜩 찌들어버린 억압과 가난의 묵은 때를 털어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넓은 영토와 다양한 민족의 문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독립한 지 이제 겨우 30년 남짓한 이 개발도상국의 행보는 이제 시작했고, 아직 한창이다.


전시를 감상하는 내내 밀고 들어오던 동정심의 정체는 어쩌면 사실 동질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산권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가난과 억압은 우리 모두에게 깊숙이 각인된 역사의 한 페이지 아닌가.


 다시 감상기로 돌아와서 전시회의 작품들은 모두 하나의 관통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카자흐스탄의 삶이었다. 삶을 녹여낸 작품은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지 않는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림인 걸 뻔히 알면서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모순을 경험하게 한다. [카나피아 텔자노프 <콕파르 Kok-par 카자흐스탄 전통 스포츠> Ⅰ캔버스에 유채]

 카나피아 텔자노프의 콕파르는 말을 타고 전통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두 명의 젊은 이를 표현한 작품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말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친 말의 움직임에 개의치 않은 듯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청년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개와 콕파르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선이 아주 굵은 작품이다. 밝고 푸르른 초원 위에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서 있음에도 전혀 가볍다거나 발랄한 인상이 느껴지는 않는다. 보는 내내 목놓아 응원하고픈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외침의 방향은 없었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를 캔버스 안에 모조리 그리면 나오는 결과물 같다. [세리크바이 알잔 <90년대의 카자흐스탄> Ⅰ캔버스에 유채]


 초입을 지나 전시관을 옮겨가면서 마주한 세리크바이 알잔90년대의 카자흐스탄에서는 갓 독립을 일궈낸 나라의 활기 넘치는 바글바글함이 가장 눈에 뜨인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온 마냥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 온 동네에서 전해져 온다. 그러나 좌우측 구석의 모습에서는 눈에 밟히는 어두운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좌측에 놓인 버스에서 어렴풋 느껴지는 비위생적이고 난잡한 매춘의 모습들이나 아직 확립되지 않은 질서가 두려운 정부가 배치한 두 명의 군인들(다행히 긴장하거나 격앙되어 있지 않다),  우측에서 무슨 일인지 잔뜩 성난 시위대를 마주하고 서있는 전경의 모습들을 보면서 격동의 시기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자 한 작가의 시선을 곁에서 같이 바라보는 것 같은 경험을 맛볼 수 있었다.

이 그림이 걸려있는 전시관은 작품들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걸려있는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천천히 걸어 나가는 레일 형식의 관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소 어지럽고 불편했다. 태동하는 국가의 어수선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약일지도.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시관에 있는 그림들이 제일 내 취향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이리저리 발을 놀리며 작품을 감상했다. 



계단을 올라가며 전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조형물과 설치미술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현대미술이 조금씩 모습을 보이더니 전시물의 마지막은 미디어아트가 모조리 차지하게 된다.


 현대미술의 비중이 많아질수록 내 감상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현대미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니와 많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나는 현대미술 특유의 극단적인 새로움 추구를 싫어한다. 오히려 식상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더 식상하다. 물론 개중에는 훌륭한 작품들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불쾌할 정도로 해체를 하고 재해석을 해놓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많은 음식을 경험해본 미식가라면 모를까 난잡하게 헤집어놓은 만찬을 즐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할 뿐, 좋은 작품은 셀 수도 없이 많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나 또한 작품의 조형미와 구성이 좋다면 깊이 들어갈 수는 없어도 기분 좋게 감상하기도 한다. 그렇게 조용히 속으로 무지에 대한 신앙고백을 읊조리면서 마지막을 향해 나아갔다.

 

 이전 전시관에서 가난과 고난에 대한 은은한 비판의 은유가 다음 전시관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모습은 흥미로웠다. 비단 공산정권뿐이 아니라 모든 정권은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그 추잡함이 배가 된다. 착취와 수탈에 대한 차디찬 냉소와 비판의 이미지를 잔뜩 내포한 작품들이 길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다.

구소련 시민들을 위한 생존 지침의 번역본(설치된 전시물의 원본은 키릴 문자로 쓰여있었다)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블랙코미디일 정도로 착잡한 현실을 보여준다. 운 좋게 A4 용지 한 장으로 된 번역본은 가져가도 된다기에 챙겨두었다가 발췌해 일부를 써본다.




‘버려진 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닥에 알코올을 함유한 액체가 조금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잘 활용하면 영혼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병을 모두 모아 남은 액체를 한 데 부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칵테일이 맛이 없다면 플라스틱 환타나 콜라병을 이용해 항문으로 흡입하는 방법이 있다. 병은 돈만 주면 식물성 식용유 판매원들로부터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한 병에 1 텡게, 열 병에 10 텡게.’


'차 찌꺼기를 버리지 말라. 차를 타 마신 다음에는 찻잎을 접이에 건져 찬물을 붓고 두세 시간 끓여서 깨끗한 휴지를 이에 적신다. 차를 살 돈이 떨어지면 이 휴지를 조금씩 찢어 차를 빨아 마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전시되어 있어도 좋은 테마라고 생각했다. 억압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혼만큼 역설적이면서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어온 어려운 기간에 비해 노골적인 작품이 적어 메시지가 다소 희미하다고 느껴지는 전시구성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가장 창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르보슨 멜리베코프 <레닌 봉> Ⅰ재활용 금속 가공]


 철제 재활용 소재에 페인팅을 하고 구겨서 만든 예르보슨 멜리베코프의 레닌 봉과 함께 다양한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를 감상하며 계속 끝으로 나아갔다.

브랜드의 모습을 한 다양한 문명과 마주한 전통의 충돌. 그 위태한 기록들. 그리고 신문물과 전통이 융합되어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양상의 창조되는 작품들의 연속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현대미술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공감이 되지 않는 작품들도 많았다. 그게 너무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이 작품들을 마주할 날을 고대한다. 그때는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전시관을 빠져나와 미술관의 벽면 통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을 온몸으로 맞았다. 전시관이 전체적으로 어두웠던 까닭인지 눈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하나의 국가를 한 명으로 의인화하여 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것 같은 전시였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느낀 기묘한 경험과 함께 오랜만에 기분 좋은 관람을 마칠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문득 내 삶 또한 누군가에겐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씁쓸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오래 지나지 않아 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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