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어른이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아이는 아닌, 그 과도기적 나이를 거닐다 보니
소위 ‘면담’이라는 행위에 있어 객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처음에는 같이 분노하고, 같이 화를 내어주는 것이 공감이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이 같을 때 형성되는 동질감도 좋지만, 싫어하는 것이 같을 때는 더 큰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도 단짝일 수 없을 만큼 합심하여 후련하게 쏘아붙인 애증의 대화 뒤로는, 참으로 괜스러운 어떤 씁쓸함이 부유하기 마련이다. 각자의 밑바닥을 보인 뒤 서로를 마주하게 될 때의 기분은 퍽이나 좋지 않았다.
알량한 죄책감이기도, 아니면 언젠가는 서로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매개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기도.
그래서 다음 한동안은 어떤 답을 내려 주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것이 부정이든 긍정이든, 고민이 있어 나를 찾아와 귀한 시간을 소비하는 당신들에게(혹은 그 시간을 투자하는 나에게)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다름 아닌 결과물 따위로 퍽이나 증명하고 싶은 공급자적 면담가로도 살아봤는데.
돌이켜보면 직언이라는 포장으로 가려진 어설픈 충고들이 귓속을 얼마나 감화시켰을지. 솔직히 본인보다 본인의 문제를 더 깊게 고민하는 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나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꼰대로서 익어 버리기 전에 서둘러 이 거름 밭을 박차고 일어나 온몸을 박박 닦아 내고는. 이젠 그저 침묵의 리스너가 되는 것을 하루가 멀다 하고 수양 중에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곡해 없이 들어줄 사람이 참으로 절실하다.
청춘을 위로하는 콘텐츠도 이젠 차고 넘쳐, 가만히 걷다가도 괜히 불행한 사람이 되는 듯싶어 이어폰을 뺄 수 없는 이 거리.
내일의 길 위엔, 이제 입이 아닌 귀로 치유받는 자가 더 많아지길 작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