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영화일기, <분노>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분노>
사적인 영화일기, <분노>
우리는 늘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행위가 때로 무겁고 불편한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관계 맺음과 유지가 만만치 않게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낯가림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사람처럼 구는 성향이 좀 더 우대받는, 나아가 이를 필수 덕목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스스럼없이 나를 꺼내 보이는 행위는 있는 그대로 말해 고단하다.
진심이든 아니든 관계는 호감과 믿음을 기반으로 하기에 누군가를 믿는 일, 혹은 나를 믿게 만드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동반한다. 최선을 다해 보여주고, 최대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한다. 관계를 만드는 일은 그래서 결코 쉽지 않다. 이를 간과한 채 그럴싸한 소속감에 정착하고자 안달 낸 결과, 요즘 나는 보여주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부적응과 이탈의 문제가 아니다. 불신으로 창조되는 세상, 혹은 불신을 창조하는 세상 탓을 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의심의 증폭은 확실히 관계를 좀먹고 있었다. 타인의 호의와 관심에 환하게 웃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 견딜 수 없기도, 그 찌질함에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순수한 호의, 애정, 믿음, 애정. 갖가지 긍정적 단어들에 대한 의심과 회의감이 밀려왔다. 마무리가 섬세하지 않은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을 천천히 꾹, 꾹 누르는 기분이었다. 정확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그런 기분. 어딘가 잔뜩 약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유마
분노하다.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낸다는 이 말에 우리는 대게 타인이나 상황에 대한 격양된 감정 상태를 떠올린다. 외부를 향한 강렬한 표출, 분출의 이미지 말이다. 살인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는 영화 <분노>에 대한 첫인상 역시 이와 흡사했다. 의문의 살인 현장에 남은 단 하나의 증거, 피로 쓰인 분노라는 글자. 살인범의 분노, 혹은 살인범을 향한 분노가 영화의 원동력이 아닐까 싶었다.
영화는 추리물이 맞았다. 숨이 가빴고 피로했다. 단, 내가 쫓는 대상은 한낮의 가정집에서 여성을 살해하고 달아난 살인범이 아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종래에는 그 누구도 범인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추리 영화를 보면서, '쟤가 범인일 거야!'가 아니라 '쟤도 범인이 아니어야만 해!'하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얼 쫓고 있었느냐 물으면, '나'를 쫓고 있었다 답할 것이다.
'유마'는 보이는 게 많은 만큼 보이지 않는 것도 많은 사람이다. 뱉어내는 것이 많은 만큼 뱉어내지 않는, 혹은 뱉어낼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런 유마가 '나오토'라는 사람에게 충동적일 만큼 쉽사리 자신의 곁을 내줬다. 한눈에 사랑했고 단번에 믿어버렸다. 그러나 유마의 신뢰는 그 시작의 속도만큼 빠르게 불신으로 뒤바뀌었다.
유마의 의심과 부정은 내면 깊숙이 남아 있던 자신에 대한 응어리에 기인했을 것이다. 그의 내면은 믿음이 의심으로, 의심이 불신으로 변하는 그 은밀한 변화를 포착하고 받아들이기에 불안정했고 약했다. 믿고, 상처받고, 의심하고,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후회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온갖거리의 감정 덩어리가 오간다. 것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흘러 들어간다. 복잡하다. <분노>는 이 복잡한 내면의 응어리들을 촘촘하고 치밀한 병렬 구조 속에 담아냈다. 각 속에서 각을 허물고 각을 만드는 기가 막힌 군상극이다. 진이 빠져 버린다. '타츠야'의 말마따나 사람의 진심을 보는 건 정말이지 힘들다.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 믿음과 불신의 모양새를 구별해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서두를 던진다. 의심과 불신이 만들어 낸 비극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보라 말한다. 어느 누구도 범인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한 명 한 명의 처진 어깨에, 조급한 발걸음에,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감정을 숨기려 노력하는 경향이 있는 혹은 이에 익숙한 인물들에게서 체념의 정서를 읽었다는 한 정신과 박사의 코멘트를 읽었다. 그는 분노의 방향이 '나'인 사람들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요동치는 감정을 밖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찌르는 방식으로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나의 응어리는, 나의 분노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유마를 통해 나를 봤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응어리 같은 분노를 지니고 살아가던 남자의 어린아이 같은 울부짖음에 덜컥 숨이 막혔다. 발가 벗겨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풀어내고 떨쳐내야 함도 채 인지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불신을 마주했다. 펑펑 울어 버렸다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