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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an 17. 2020

우리가 호스텔에 가는 이유

후안 말대로 메데인, 스파르타 에스빠뇰 속성 과외와 요란한 파티


언어는 역시 실전


메데인의 첫날 저녁, 호스텔에서는 작은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호스텔 한켠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을 술병으로 가득 채우던 몇 명의 남자들이 파티의 주도자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와 잠시 나눈 대화로 혼란을 겪은 우리는 호스텔에 들어서자마자 후안을 붙잡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그러다 몇몇 새로운 얼굴이 후안의 곁에 앉아 흥미롭다는 듯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남자들이었다.


“메데인 환영 인사는 우리가 해줄게! 같이 놀자!”


부모님을 만나러 휴가 때마다 콜롬비아에 와서 지낸다는 프랑스 친구 ‘가브리엘'은 고맙게도 우리의 통역사가 되어 주었다. 가브리엘과 후안, 그리고 곰인형처럼 선한 인상이 특징인 ‘윌’이 모이자 그곳은 하나의 학원이 되었다. 윌과 우리 사이를 오가며 영어를 에스빠뇰로, 에스빠뇰을 영어로 번역하느라 바빴던 가브리엘과 후안은 에스빠뇰은 너무 어렵다는 우리의 말 한마디에 대뜸 통역은 그만두고 선생님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들의 학습은 효과가 있었다. 백날 외워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지를 몰라 묵혀 두기만 했던 단어들이 우리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 이것도 알아! 저것도 알아!”하고 자랑하듯이 말하면, 기꺼이 선생님이 되기로 작정한 이들은 사전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미묘한 차이를 대화 속에서 설명해 주고는 했다. 우리가 곧잘 따라하자 재미가 생긴 건지 이말도 저말도 나서서 가르쳐 주는 삼인방에 구경만 하던 ‘호벤’까지 가세했다.

 

“이제부터는 에스빠뇰만 쓸거야. 한 번 추측해봐. 그렇게 해야 빨리 늘어!”

“너네 방금 뭐라고 한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조금만 천천히 말해줘!”

“너희가 한국어 쓸 때도 똑같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래, 한 번 말해봐!”


평소에는 하지 못할 행동을, 하지 못할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알코올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알코올은 우리를 낙천주의자나 어린 아이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운동가나 혁명가, 작가로 만들기도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로 ‘말'을 하는 데 알코올의 힘을 사용했다. 맨정신일 때는 뱉어놓고도 한참을 고민하게 되던 언어가 술만 마시면 그렇게 쉽게 술술 나올 수가 없다. 이 표현이 더 적절하지는 않았는지, 방금 한 말에 문법적 오류는 없었는지 고민하는 사소한 걱정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좀 틀리면 어떠랴. 찰떡처럼 알아들었다면 고마울 일이고, 또 알아듣지 못했다면 다시 설명하면 될 것을.




그러니까 너희도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거지?


시시때때로 선곡을 바꿔가며 주방에서 현관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추던 ‘빅토르'는 브라질에서 온 친구였고, 그런 빅토르의 옆에서 맥주병을 머리에 얹어가며 함께 춤을 추던 또 다른 ‘후안'은 산만한 덩치와 상반되는 이미지로 ‘니뇨(남자아이) 후안'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였다.


“니뇨 후안 말이야, 괜찮은 거지?”

“아까는 귀엽다면서.”

“귀엽다는 말 취소할래. 니뇨 후안! 에스따 비엔?(너 괜찮아?)”


쉴 새 없이 술을 마시고, 또 쉴 새 없이 몸을 흔드는 빅토르와 니뇨 후안은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가진 콤비였다. 너희는 언제부터 친구냐고 묻자, 웬걸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란다. 세상에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서로가 편안하고 익숙해 보여 당연히도 친구 사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누구에게서 시작된 건지 모를 이 파티의 모든 구성원들은 호스트와 게스트로, 그리고 게스트와 게스트로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평소에도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인 걸까. 어쨌거나, 모두가 참 밝고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비싸고 양이 적은, 그래서 아껴 마셔야 하는 술들은 금세 바닥이 났다. 가브리엘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나 둘 주머니에서 페소를 꺼내 맥주를 사 올 만큼의 돈이 모였고, 서둘러 호스텔 근처의 구멍가게로 향했다.


“너희는 내일 뭐해?”

“우리 아마 엘 뻬뇰에 갈 것 같은데? 날씨만 좋다면.”

“같이 갈래? 나 내일 거기 가서 수영할 거거든.”

“수영? 웬 수영?”

“물 밑에 잠긴 옛 마을을 구경하는 거야. 멋지지 않아? 같이 가자!”


메데인에 오기 전, 그곳까지는 어떻게 가는지, 가서 무얼 보고 오면 되는지 등 엘 뻬뇰과 구아타페 마을에 관한 정보를 꽤 찾아봤던 우리였다. 나름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브리엘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엘 뻬뇰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는,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거대한 호수를 수영할 모험 정신은 없었기에, 우리는 그저 엘 뻬뇰을 걸어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가브리엘은 아쉬움을 표했지만, 가는 길은 함께 하자며 다음날 아침 8시가 되면 꼭 깨워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다시 채워 놓았던 맥주도 금세 사라졌다. 빈 병을 치우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의자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은 후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갈 때가 된 거다. 별일 없이 지나갈 것만 같았던 메데인에서의 첫날은 예상보다 소란스러웠고 요동쳤으며 꽤 즐거웠다. 그 틈에 섞여 잘 떠들고 잘 마시고 잘 놀았다.



침대 위로 기절한 듯 잠에 빠진 다음날 아침, 놀랍도록 정확히 가브리엘은 8시 정각에 방문을 두드렸다. 약간의 숙취로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는 가브리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주방으로 향하자 후안표 상큼한 요거트와 시리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던 메데인 호스텔에서의 어느 아침. 아무래도 너무도 빠르게 이 공간에 정이 들어 버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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