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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an 22. 2020

메데인 버스 터미널에서 노숙, 우리 괜찮을까?

후안 말대로 메데인, 오늘 칼리 가는 버스 없어요


매진 행렬 혼돈의 메데인 버스 터미널


오후 8시를 조금 넘겨 터미널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터미널을 가득 채운 인파와 길게 늘어선 줄, 그리고 이미 불이 꺼진 몇몇 창구들이 보였다. 그제야 우리는 코 앞으로 다가온 불안을 실감했다. 후안의 우려가 현실이 된 거다.


버스 터미널 내 통합 창구에서 모든 버스 회사의 노선과 시간표, 가격을 관리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콜롬비아에서는 버스 회사마다 각자 창구에서 직접 표를 판매한다. 그래서 회사에 따라 버스의 시설도, 가격도, 시간도, 노선도 모두 천차만별이다. 온라인 예매 시스템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라 직접 터미널을 돌아다니며 여러 조건들을 따져 보는 수고가 필요했다. 나의 노력에 따라 같은 가격이지만 화장실도 없는 버스를 탈 수도, 화장실은 물론이고 따뜻한 담요와 푹신한 좌석이 제공되는 버스를 탈 수도 있는 거다. 운이 좋다면 즉석에서 가격 흥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메데인 버스 터미널의 창구는 대략 70개 정도. 신속하게 셋으로 나뉘어 ‘CALI’라는 글자가 적힌 회사마다 오늘 저녁 버스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오늘, 칼리 가는 버스 없어요.”

하필 칼리만, 전부 매진이다.


“후안, 칼리 가는 표가 진짜 하나도 없어!”

“거봐, 내가 뭐랬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처럼 칼리행 표를 구하지 못한 이들 중 몇몇은 ‘페레이라’와 같이 메데인과 칼리 중간에 위치한 도시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결정이 쉽지 않았다. 페레이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방금 처음 알았는데, 언제 어디에서 멈출지 모르는 페레이라행 버스를 타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어떻게 하지? 내일 첫차라도 사둬야 하나?”

“아, 모르겠어. 근데 이 줄은 뭐야?”



불이 꺼진 창구 앞으로 긴 줄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제일 앞에 선 아저씨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물으니 칼리행 버스가 추가로 생길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무작정 기다리고 있단다. 앉아 있는 직원 한 명 없는 창구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우리 또한 기다림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순간, 창구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버스 생겼대요?”

“응, 이따 열두 시에 출발한대. 우리는 이미 샀어. 운 좋으면 너네도 살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좀 기다려봐.”


하지만 상황은 아저씨의 예측과는 아주 다르게 진행됐다. 암시장이 형성된 거다. 말이 통하는 자들끼리,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들끼리. 뒤에서 연신 쪽쪽대며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만 봐도 창구 앞 무리에 섞여 몇 번 말을 주고받더니 어느새 줄에서 빠져버렸다. 순식간에 줄은 원래의 모양을 잃고 흐트러졌다. 너도 나도 우르르 몰려가 돈을 내밀며 표를 샀고, 금세 새로운 버스마저 매진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풍경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멍하니 보고 선 사람들도 있었다.


새로운 버스의 매진과 함께 우리의 터미널 노숙 또한 확정되었다. 혹시나 하고 미리 구매해 둔 아침 여섯 시 버스표가 있어 다행이었지만, 버스가 올 때까지 여기에서 적어도 열 시간은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


중앙의 환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매점으로 달려가 핫도그를 하나 주문했다. 어쨌든 배만 부르면 반은 기분 좋게 넘어가는 구석이 있는 우리이기에, 따뜻한 핫도그와 시원한 콜라야 말로 이 상황을 견디기에 꼭 필요한 한 가지였다. 매점은 새벽 내내 운영되는 곳이었고, 이후로도 우리는 출출하거나 지루할 때마다 걸핏하면 그곳으로 향했다.



사실, 터미널 중앙의 환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건 옷이며 돈이며 다 들어 있는 배낭을 누가 가져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불 꺼진 터미널, 노숙자나 소매치기들이 모여드는 늦은 밤의 터미널을 상상하자 덜컥 겁이 났다.


우려와 달리 버스 터미널에서의 하룻밤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매시간마다 경찰들이 터미널 곳곳 정찰했고 청소부들과 매점 직원들도 분주하게 지나다니며 일을 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이곳에 온, 딱 우리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이 있었다. 핫도그를 사 먹는 사람들,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밤 버스에서 덮으려 했을 두꺼운 담요를 둘러매고 앉은 사람들까지.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잠시간 떠올렸던 공포로 가득한 상상들이 우스워졌고, 슬며시 드는 안도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동이 틀 시각이 가까워지면서 터미널은 원래의 소란스러움을 되찾았다. 우리는 약간의 지루함과 몰려오는 졸음을 견디며 아침 해를 맞았고, 피곤한 눈을 꿈뻑이며 칼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열 시간 만에 터미널을 떠났다. 예상보다 많이 늦었지만, 오늘 오후쯤엔 칼리에 도착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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