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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신실함

2016.10.3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던진 질문에 무슨 말로 대답하실지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 기다려보리라.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보리라." 하였더니 야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받은 말을 누구나 알아보도록 판에 새겨두어라.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다른 종교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모한 긍정을 하는 신은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성서 곳곳에는 예언자와 야웨 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수도 없이 오고간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다른 눈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저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기울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말은 무조건 예수에게로 소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무책임한 반신학적 습성을 버려야만 합니다.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면 예수에게로 무엇이 소급되었는지 그 내용을 말할 수 없고, 그렇게 예언자들의 말은 얄팍한 구원논리에 악용될 뿐입니다.


예언자들은 이 땅의 불의와 죽음, 고통과 절망에 대해 탄원합니다. 자신 마음 깊은 곳으로 높이 솟은 야웨의 보좌 앞에 나아가 넓은 그의 자비 속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찌릅니다. 야웨의 심장은 그의 헤세드로 인해 늘 공격을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예수의 증언과 상통합니다. 어떤 면에서 예언자는 온 세상의 어둠으로 벼린 검을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야웨의 심장을 찔러대는 가혹한 운명을 맡은 자입니다.


세상의 어둠에 의해 폭행당하는 야웨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하바꾹 예언자를 향해 결국 답변을 던집니다. 일견 무책임해 보입니다. 그 날이 언젠가 온다는 것입니다. 금방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반드시 분명히 그 날은 온다. 그러니 멋대로 설치지 말고 (나의 법도를 벗어나지 말고) 신실함을 가지고 의인으로 살라고 대답합니다.


지금의 삶이 어둠이고 고통이고 죽음이고 불행이며 불의로 가득찬 이들, 즉 우리들에게 이런 대답은 "정신승리"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역할은 그것입니다. 저의 용어로 하자면 "아직도 숨겨진 가능성들을 찾아 새로운 흐름을 만들도록 돕는 눈을 갖게되는 것"이 정신승리이며 종교는 그것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종교는 밥을 먹여주지 않습니다. 예수가 "하늘의 새도 들의 꽃도 먹이시는 주님께서 너희를 잊으시겠느냐?"고 한 말을 들은 이들은 그러니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넋을 놓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다시 삶으로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그 날은 온다, 더뎌도 반드시 온다, 그러니 ... 야웨가 원하는 단 한가지는 "신실함"입니다. 이는 보통 믿음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국교회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너무나도 심각하게 오염시켰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또한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한결같은 태도와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신실함입니까? 무엇에 대한 희망입니까? 창조의 때에 그리고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뭇 생명의 깊은 곳에 충만한 야웨의 자비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게 했고 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곧 하나님의 자비를 향한 신실함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 생명을 살리고 공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이, 그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질 날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사는 충분합니다. 야웨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공의를 바로세우는 것, 경계를 뛰어 넘는 것 ...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동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를" 흐르는 하느님 자비의 강을 믿을 수 없어도 몸을 던져 한결같이 살아가는 신실한 움직임, 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정신승리"를 "우리 몸으로 구현해 내야"합니다. 야웨의 부름의 자리는 바로 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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