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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세월호 참사의 신정론

그리고 이태원 참사

2016.11.23


내 실존을 처음으로 뒤흔들어 사회라는 차원으로 나를 이끌어낸 것은, 아버지가 이화여대에서 건설노동자로서 당했던 차별의 경험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난 내가 '노동자의 자식'이라는 계급의식에 눈을 떴다. 그 전까지는 막연히 SKY대학을 나와서 삼국지의 제갈공명같은 경제학자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떨어지는 성적과 함께 정체성을 헤매는 사춘기의 고민들은 나를 서서히 현실로 불러들였고, 그 날 이후로 전교조 선생들을 통해 전태일을 알고 신영복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나에게 세상은 사회는 불의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생각을 벗어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만족하지도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실제 현실이 그러하니까.


주위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그 전에 내게는 많은 작은 세월호들이 있었다. 대추리가 그랬고, 노동운동을 하다 죽어간 '열사'들이 그랬고, 용산참사가 그랬고, 북아현이, 명동 마리가 그랬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그 날 그 평온했던 하늘과 바람과 땅과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토할 것 같은 괴리감을 견디고, 버티며, 함께 해야 했다. 그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신정론은 늘 고민거리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랬고 여전히 그럴 것이다. 세계의 불의, 인간이 만들어낸 불의가 인간을 죽일 때 느낄 수밖에 없는 토할 것 같은 괴리감.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은 '고아와 과부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과 함께 살았던 이들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을 들려줄 뿐이다. 우리는 세월호에 갇혀 죽어갔던 이들이 지금 발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신조차 우리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줄 수 없다.


어쩌면 '신정론'이라는, "우리가 고통받을 때 하느님은 어디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지금 이 순간의 우리는 고통받는 당사자가, 죽임당한 당사자가 아닐 수 있다. 그 질문은 오히려 그 고통과 죽음의 목격자들의 탄식이다. 왜 저들이 억울한 고통과 죽음에 시달려야 하는가? 왜 이렇게 세상은 불의하고 어그러졌는가?


하느님은 침묵한다. 고통받고 죽어간 이들도 침묵한다. 우리는 그 누구의 말도 들을 수 없다. 우리의 질문만이 외로이 울려퍼진다. 말장난인 것 같지만, 그건 하느님이 곧 고통받고 죽어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느님도, 고통받던 이들도, 죽었다. 역사의 저 끝에 침묵만이 남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산 자는 결코 죽은 자의 발화를 들을 수 없다.


신정론은 답변될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한 당사자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신정론에 결코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아니, 어쩌면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 토할 것 같은 괴리감을 몸에 새기고, 걸머지고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신정론은 십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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