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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신과 칼 세이건의 말

2017.1.18



칼 세이건을 알고 컨택트를 읽고 코스모스를 읽고 듣고 보고, 이제 최근 번역된 칼 세이건의 말 (인터뷰 모음집)을 보고 있다.


이 책 내용 중에 가장 짜증나고 따분하고 재미없게 읽은 부분이 가톨릭 잡지와의 인터뷰였는데, 그건 내가 종교인이면서도 종교를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를 싫어한다기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적 정서에 비판적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과학의 옳은 작업은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혹은 그런 용도로 이용될 수 없다. 이 부분은 일단은 과학철학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그래서 과정철학이란 학문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신은 인간이 사라지면 (만약 '실존'으로서의 신으로 제한한다면) 그 존재가치를 읽게 될 것이고, 인간이 존재하며 함께 살아가는 한은 '사람의 살갗이 마주칠 때 발생하는 정전기'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두 손을 맞잡는다고 정전기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다른 물체나 생명체와 접촉해야 한다.


굳이 말하자면 신은 관계 사이에 번뜩이는 찰나의 깨달음과 같다고나 할까? 칼 세이건이 주장하는 인류의 힘이 그러하듯이, 신을 믿고 종교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과 그것조차 넘어서(초월)려는 창조성을 동시에 지녀야만 한다. 


물론 그걸 추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의심과 초월(창조성) 모두 사람이 살아있게 하는 활력(Vitality)의 다른 이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자본주의에 지쳐버린 여타의 현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지쳐있다가, 종교가 주는 안정과 위안을 버팀목 삼아 살아갈 뿐이다. 그런 종교인들만을 탓할 순 없다.


칼 세이건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은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 의심과 창조성을 추구하거나 안정과 위안을 추구하거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나와 너와 우리와 우주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과학적 근거에 의한 통찰이 던지는 요구는 어떤 면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정치적이다.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종교인들이 종교적 성찰과 투쟁을 통해 칼 세이건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를 더 진전시키면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정립하고 새로운 행동을 촉구하게 된다. 아름답고 광막한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 대한 칼 세이건의 표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 머물 유일한 자궁이자 집인 지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살아남음이 인간적인 생존임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와 공존의 다른 이름임도 말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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