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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성서 읽기

2017.2.8



퀜틴 스키너의 책 "역사를 읽는 방법"은 어느 신문기사의 책소개처럼 사실상 "정치사상적 고전을 읽는 방법"이나 다름없다. 역사 일반을 범위로 한다기보다 사상사, 지성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독법을 펼치고 있다.

내가 발견한, 퀜틴 스키너의 "역사를 읽는 방법"이 성서연구자들에게 줄 수 있는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 6장까지의 내용에 근거한다.


현재 시점에서 하나로 취합한 어떤 특정한 개념(예를 들어 구원, 은혜 등등)을 구심점으로 삼아 이러한 개념들에 성서 기자들이 어떤 입장을 표했는지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성서를 구성하는 책'들'의 저자(들)의 동기와 의도를 간과하거나 놓쳐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스키너는 동기와 의도, 행위와 의미를 구별한다. 애초에 우리는 성서가 다양한 저자들의 다양한 입장이 담긴 진술임을, 심지어 그 문서의 장르 또한 매우 다양함을 무시하고 성서를 볼 때가 아주 많다.


생활인들의 성서읽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서연구자들은 이제 "강단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뜻풀이 하며 생활인들의 성서 해석권력을 숨겨버리는" 잘못된 태도에서 벗어나 퀜틴 스키너가 말하는 것처럼 저자(들)의 동기와 의도, 행위 - 그것이 발휘하는 효과 - 와 의미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충실하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서는 좀 더 철저한 스키너적 방법론의 적용을 요구해야 할만큼 기존 교리의 억압적인 간섭이 극심하다. 스키너적 관점으로 성서를 연구하면, 우리는 마치 욥기 23장 10절이 개역개정과 새번역에서 그 동기와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데서 받는 충격을 다른 성서 구절에서도 무수히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vs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저자의 동기와 의도, 행위와 의미에 대해 스키너가 주로 제기하는 문제점은 텍스트가 "아이러니"할 때이다. 비꼬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위의 욥기 구절이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번역에 따라 - 다시 말해 해석에 따라 - 수많은 의미가 가능하다면, 특히 그 의미가 많고 복잡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특징을 기억할 때 용례와 가능한 의미의 물리적 갯수가 늘어난다면, 스키너까지 갈 것도 없이 단어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고 여기에 저자의 동기와 의도까지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게 된다면 그 의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키너는 이러한 현상이 필요하다고 보며, 무엇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텍스트를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간극을 그대로 둔 채로 멋대로 개념을 분류하고 유형화하여 각 저자들의 각각의 동기와 의도를 파묻어버릴 위험을 극복하고 가능한한 다양한 해석들이 높은 수준의 정확도를 갖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반드시 있어야 할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이 책을 성서연구자들에게 특히 권한 이유는 위에 적은 대로, 성서연구자들이 전념해야 할 지점은 저자(들)의 동기와 의도, 행위 - 그것이 발휘하는 효과 - 와 의미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충실하게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키너가 제안하는 역사가적 태도이고, 그가 말하는 것처럼 "아퀴나스가 어떻게 신이 삼위이면서 동시에 나뉠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에 도달하고 이를 옹호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면 해석자로서의 우리 임무는 끝난다. 그에 더해 아퀴나스가 믿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한다는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서연구자들의 역할도 여기까지라고 본다. 해석을 위한 다양한 이해들을 제공하고, 그 해석을 생활인의 성서읽기에 맡기는 것.


그러므로 나는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한 해석을 극도로 경계하고 심지어 거의 혐오한다. 그런 건 없다. 적어도 성서가 완성되기까지의 시절에는 없었다. 믿음의 조상들에게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게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없었던 것을 만들어서는 우리가 만든 것을 가지고 믿음의 조상들에게 덧씌워 그들의 동기와 의도, 행위와 의미를 덮어버리려는 이율배반적인 시도에 대해서는 "정직과 겸손으로"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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