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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알지 못하는 신

2019. 5. 13


사도행전 17장 21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23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의 찬란한 통치의 시기였으며, 서양 문명이 유례없이 빛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산 위의 동네가 숨길 수 없는 세상의 빛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 찬란함과는 전혀 다른 빛으로 제국의 찬란함을 어둠으로 돌려세웁니다. 진정한 빛이 나타난 것이죠. 바울이 전한 예수는 바로 진정한 빛, 가장 찬란하고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빛이 신을 밝히 알게 한 이 가장 찬란한 시대에 알지 못하는 신이라니, 그 신이 바로 예수이며 하느님이다! 목숨을 걸고 선포하며 복음을 전한 이가 바로 바울이었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찬란한 빛은 오히려 기독교가 제국의 공인을 받으면서 치명적으로 가려지게 됩니다. 중세를 지나며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비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알지 못하는 신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으로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찬란한 빛이 인간에 의해 제도화되고 가시화될 때 사람들에게서 숨어버리는 것은 하나의 신앙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는 자주 그런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인간이 고통 속에 몸부림칠 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왜 밝히 나타나시지 않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고통을 가하는 인간이 그 빛을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지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사건들이,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들이 이를 증명하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신정론적인 질문과 대답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이상 찬란히 드러나는 빛의 하느님과 알지 못하게 숨어버리는 어둠 속의 하느님은 둘 다 버릴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그리고 그 분이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며 찬란히 빛나는 하느님을 봅니다. 그 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히 배웁니다. 하지만 그 길을 따르기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아마도 우리의 시선 속에서 그 분은 철저히 어둠 속에 계실 것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역사는 바로 하느님의 드러남과 숨겨짐의 역사, 빛과 어둠의 하느님,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연속입니다. 하느님이 자의로 나타나고 숨으시는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는지는 신학적으로 꽤 중요한 논쟁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그 분을 알기도 어렵고 역사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도 알기 어렵습니다.


성서 속에서도 하느님은 얼마나 많이 숨겨지는지 모릅니다. 호렙산에서 모세 앞에 나타난 하느님은 “나는 나다”라고 밖에는 자신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대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며 자신을 역사 차원에서 드러냅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드러나는 동시에 숨겨집니다. 욥기를 볼까요? 욥과의 거친 논쟁 끝에 하느님은 욥에게 “너는 아느냐??!?!?!”며 질문을 퍼붓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힐난에 가까운 그 외침 끝에 욥은 굴복합니다. 하지만 왠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을 오히려 더 알지 못하겠는 건 왜일까요? 이 외에도 하느님이 숨겨지거나 숨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성경에 더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느님이 드러나는 시대일까요 숨겨지는 시대일까요? 각자 대답은 다르겠지만 저는 둘 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노력에 의해 하느님과 예수와 성서는 끊임없이 연구되고 그 메시지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삶으로 하느님을 밝히 드러내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하지만 또한 하느님은 끈질기게 숨겨집니다.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여 교회를 떠나고 의로운 길을 떠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은 어둡고, 그것보다도 더 하느님은 어둠에 싸여있는 듯 합니다.


뛰어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둠을 통과하여 경험하는 하느님에 대해 말합니다. 이 때의 어둠은 앞에서 말한 부정적인 어둠과는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그러한 어둠도 있지만, 그 어둠 끝에는 하느님이 계시며 그 어둠을 통과해야만 하느님과의 합일, 연합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하느님에게서 빛과 어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밝히 드러난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어둠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생 내내 계속될 것입니다. 


단순히 삶의 굴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을 오늘날에 맞게 재정의한다면 아마도 빛과 어둠의 하느님, 드러나며 숨겨지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자신의 드러남과 숨겨짐을 통해 인간을 만나고 그 인간을 통해 일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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