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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민감한 사람 유형의 야웨

2020. 2. 8


나는 야웨가 '매우 민감한 사람 유형'에 해당하는 신이라고 믿는다.


천지를 창조할 때 상황부터 보자. 6일동안 집중하고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창조한 다음에 세계랑 같이 노는 게 아니라 쉰다. 민감한 사람들은 창조적인 일을 하거나 사교적인 행위를 한 뒤에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줄곧 "하나님은 단독자, 홀로 있는 분"이라고 배웠지만 그게 아니라, "열심히 활동하고 나면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쉬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럼 삼위일체는 뭐냐, 일종의 "자기객관화 노력"의 산물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본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상태에서는 자기검열을 잘하고, 긍정적인 상태에서는 자기객관화를 한다. 자기가 자기를 질책하고 부정하는 것도 자신이고, 자기가 자기를 긍정하고 안아주는 것도 자신이다. 그런 자신들이 모여, 인간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관계형을 맺고 있는 게 삼위일체 신론이다.


야웨는 기본적으로 "관찰자, 예언가" 스타일이다.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예의 살피며 분석하고 심사숙고한 뒤에 행동에 옮긴다. 출애굽, 광야에서의 지긋지긋한 40년, 가나안 정착 모두 그런 야웨의 성향 때문에 생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고생의 기록이다.


야웨는 또한 공감능력이 심각하게 뛰어나다. 그래서 행동보다 감정이입이 더 빠르다. 같이 웃을 때는 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서 같이 부어먹을만큼 미친듯이 놀고, 같이 울 때는 이미 세상의 종말을 선포한 것 처럼 운다.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나오는 말들은 실연당한 사람이 보낸 새벽 라디오 사연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10회 이상 수상할 수 있을만큼 감성적인데, 그 안에는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희로애락이 다종다양한 스타일로 기록되어 있다. 인간이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까닭이 다 있는 것이다.


야웨가 민감한 사람 유형이기에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신정론이다. (feat. 과정신학)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야웨는 결코 하나의 사건의 발생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 배경과 상황과 맥락을 다양한 시점과 시야와 톤과 흐름과....하여간 모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모두 긁어모아서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란 주장을 '신은 디테일에 숨어있다'는 주장(feat. 코니 윌리스)으로 바꿔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한때 철학자들이 미친듯이 기독교의 신을 정의하고 알아내려 파고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본질이니, 진리니, 인간에게 불투명하고 흐릿한 걸 야웨가 굳이 숨바꼭질하듯 숨길 이유가 없으니.


야웨의 문제해결은 분명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 놓여있지만, 그것을 이뤄내야 하는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뼛속 깊이. 어떤 기독교 종파는 신이 나서 '원죄' 운운하지만, 굳이 원죄론을 펴지 않아도 얼마든지 현상적으로 증명 가능하다. '사탄 의문의 1패'라는 온라인 밈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사탄의 초자연적인 속삭임이 없어도 인간은 얼마든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뻔뻔하게 끔찍한 죄악의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원죄론은 이러한 죄의 깊이를 대면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위대한 신학자로 추앙받는 어떤 이가 그랬다지? '악은 선의 결핍이다'라고. 맞는 말이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해석이 필요할 뿐이다. 선을 정의할 때 '자연스러운 것', '당연히 그래야 할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것이 없거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배제하고 파괴한다면 바로 그것이 죄다. 그렇게 치면 '선'은 역사와 시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는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었다. 기독교 안에서도 정교합일의 역사가 있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치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들은 몇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있게 '선'이라고 말할 것도, 그것의 결핍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악'의 범위도 지극히 작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감히 야웨가 여전히 하고 있는 고민이 이 지점에 맞닿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들에 용감히 개입하지 않(못하)는 이유,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그것의 결핍인 악인지가 상황과 맥락과 시야와 각도와 흐름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이른바 '교차성'에 대한 고민은 이미 야웨가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끙끙거려온 고민과 맞닿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야웨는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추동하고 선동한다. 회개하라고, 움직이라고, 나를 따르라고, 깊이 기도하라고, 사랑하라고. 그 중심에는 야웨가 받아안은 감정들이 있다. 민감한 사람 유형으로 바꿔 말하면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만큼 누구보다 기뻐하고 누구보다 슬퍼하는 그 존재가 그렇게 자신 안에서 처리한 감정을 인간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역사에는 끊임없이 정의를 향한 갈망, 올바름을 향한 투쟁, 변화와 능력에 대한 몸부림이 있는 것이다.


야웨가 세상 모든 일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식별하고, 고민하고, 감정을 받아안고, 그 결과물을 인간과 공유해서 그 일에 동참하게 만들고, 정의와 변혁을 외치는 그 모든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발생한다. 민감한 사람 유형의 야웨는 결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은 민감할 수 없다. 자신의 개입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을 모두가 만족할만하게 해결할 방법을, 민감한 사람 유형의 야웨는 아직 찾지 못했다. 심정은 찾고 싶어 미칠지경이지만, 그래서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사건과 인과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다 믿는 인간들이 수도 없이 배신을 때리니 한눈팔 정신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의와 변혁과 완전을 향해서 싸우고 사람들을 모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야웨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비' 때문이다.


야웨가 사건에 대한 상황과 맥락과 시야와 각도와...하여간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끙끙대는 이유는 바로 그 '자비' 때문이다. 자비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 끝끝내 신실하게 야웨라는 존재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렇게 하는 데는 딱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창조했기 때문도 아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외로워서도 아니다. '그냥 그러한 것 (I am Who I am)',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 자연, 그것이 '자비'다.


정신승리라 부르든 뭘로 부르든, 인간이 끝도 없는 세계의 위협의 파도 속에서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야웨의 '자비'에 있다. 자비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권력구조의 산물이 아니다. 자비는 용서가 아니다. 자비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너를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함께하며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투쟁이다. 때로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공간이 필요함도 알고 그것을 허락하지만, 이어진 것을 끊기지 않게 지키려는 노력이다. 민감한 사람 유형들은 자신에게 혼자만의 시공간이 필요한 것은 나를 온전히 다듬고 힘을 채움으로써 타인과 더 잘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안다. 그 내버려둠과 여유 속에 자비가 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에는 감성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정의를 위한 투쟁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자비가 나선형처럼 미친듯이 꼬여 있다. 게다가 야웨의 자비라는 것은 야웨마냥 많이 민감해서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잠깐 만나더라도 금세 힘을 잃고 혼자만의 시공간으로 숨어버린다. 만난 이에게 자신의 힘을 송두리째 줘버리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다시 정의를 위한 투쟁, 존재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다.


예수가 왜 아기의 모습으로 세계에 첫 모습을 드러냈을까? 외부의 자극에 취약하며, 자극이 왔을 때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야웨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야 했을까? 세상이 주는 뒤틀린 불의와 고통의 자극에 야웨처럼 반응하다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자리, 민감한 사람 유형으로서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처해져 야웨의 정의와 자비에 대적하는 인간세계의 궁극적인 악의 일면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자신들이 맡고 있는 이 세계에서의 책임을 전하고 동참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도 그 목적의 연장선상이다. 야웨와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감한 사람 유형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면 내가 '민감한 사람 유형'을 신계에 올려놓으려는 것인가 의심하는 분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런 되도 않는 썰을 푸는 이유는, 내가 민감한 사람 유형이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배운 게 신학잡설이니 요즘 보고 있는 민감한 사람 관련 책 내용과 짬뽕시켜 본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믿는 야웨는 민감한 사람 유형이더라.


아무래도 내가 나랑 같은 유형의 야웨를 발견해버리는 바람에 아직도 기독교인 정체성을 못 버리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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