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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Feb 24. 2023

나의 신학

2016~17년 경에 쓴 것으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고쳐써야 할 부분이 많지만
큰 틀에서 비슷하므로 보존을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볼 때,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과 뜻이 점차로 희석되거나 시대에 맞게 발전적으로 해석되는 흐름들이 반복되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뜻이 희석된 경우는 교리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도식'인 양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이 세계에게 적용될 때였다. 그것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모든 신학적 스펙트럼과 교회를 망라한 경향이다. 하지만 시대에 맞게 예수의 복음(삶과 뜻)이 발전적으로 해석된 경우에는 노예 해방이 일어났고, 민주주의가 일어났으며, 인권에 대한 인식과 압제자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작은 공동체들도 함께 일어났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에 맞게 예수의 복음을 발전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어떤 신학을 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시대는 기존의 권위와 전통, 기준, 윤리, 교리들 모두가 도전을 받게 되는 시기이다. 혹자는 그것을 포스트모던이라는 양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섣불리 그렇게 재단할 수는 없다. 각 국가 단위, 민족 단위, 지역 단위, 개인 단위별로 그 양상과 현상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구촌 전체까지의 모든 스펙트럼에서 누구 한 단위도 완전히 같은 기준들을 가질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시대에 예수의 복음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아직도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자각하지 못한 듯 하다. 예수의 복음은 어떤 교리와 도식에 갇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전의 교리, 아니 시대에 관계없이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를 하나님의 직접계시인양 믿고, 선전하고, 강요하는 집단과 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이든, 어떤 교리든, 어떤 실천의 모습이든, 그것이 도식화되고 절대화되는 순간 그것은 자유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기독교가 가질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용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본인은 그 질문에 대해 '생명'이라는 단어로 대답하고 싶다.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었고,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모든 것이 부정된다 할지라도 우리 각자, 개인이 이 세상 어느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일지라도, 그 존재와 관계하는 무엇something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지구, 나아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실존들이다. 그리고 그 실존들의 관계망이 사회로, 지역으로, 국가로, 가족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들을 지탱하는 기반은 바로 '생명'이다. 


'생명'이란, 그 존재 자체뿐만 아니라 존재를 지탱케 하는 존재조건도 포함한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그것이 모여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거주 조건을 가능케 하는 요소가 된다고 할 때, 그 돌도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모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생명을 가능케 하기 위해 생명을 소멸시키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인간이 자연 즉, 생명을 가능케하는 조건이자 생명이기도 한 범주 속에서 존재한다고 할 때, 인간은 자연의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자연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한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소멸키시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기에 자연은 소멸과 생성의 법칙에 따라 운용되고 유지된다. 인간도 생성과 소멸의 대법칙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생명의 대법칙을 위반하는 모든 행위를 최소화하면서도, 인간 존재로서의 권위 (인권)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환경의 보존과 가꿈을 지지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조건을 지키는 모든 행위를 지지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지지하는 그 행위를 실천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기독교는 생명을 죽이는 모든 행위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특별히 기독교, 아니 모든 종교가 인간의 관점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때, 인권의 문제를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을 소멸시키는 모든 행위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성서의 해석과 윤리적 기준, 그 외의 개인으로부터 가장 큰 집단 단위에 이르기까지에서 발생하는 가치와 기준들은 바로 이러한 생명 존재를 지키는 최소한의 원칙에 동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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