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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피하라는 함정 피하기

by 엔틸드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편집없이 그대로 실어본다.

내란이 격화되고 그 중심축에 극우개신교가 있는 이 때, 보수적 기독교의 토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을 찾아 떠난 이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끊임없이 침입하며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이분법과 그에 대한 경계심을 주제로 했기에 공화국의 수호자와 공화국의 파괴자가 극적으로 나뉘어 싸우는 이 전쟁의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2019.1.21


진보와 보수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고 많이들 말들 한다만, 사실 진보와 보수는 지향점의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일 뿐더러, 사람의 뇌는 일종의 경로의존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많은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때 기존의 논리구조를 참조하여 빠르게 분류한다. 그렇기에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어쩌면 그 말 자체가 틀린 주장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이분법 - 짜장과 짬뽕 같은. - 들 중 극복해야 할 이분법을 골라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모든 이분법을 극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전체를 보는 방법]이란 책에 의하면 세포조차 '생각'이란 걸 하며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복잡다단복합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진보적인 교회에 몸담다가 실망하고 떠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건 그 개인의 성향이 극단적이어서라기보다는 한국 교회가 그만큼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직성은 어쨌든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어느 진영이든 그러한 경직성을 이용해서 권력이나 이익을 취하는 '윗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촛불로 대통령을 탄핵시킬 정도로 여전히 다이나믹한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한국 교회가 매우 경직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경험적으로 한국 교회가 얼마나 굳어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매커니즘을 규명할 필요는 있다. 교회(종교)가 사회와 갖는 관계 속에 그 답이 있다.


선교 초기, 그리고 한국전쟁과 대규모 경제발전 드라이브의 시기에 한국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도 다이나믹했다. 비록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지만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좌와 우 모두에서 격렬하게 부딪치고 때론 협력하며 엄청난 이야기들을 만들고 한국 사회 형성에 일조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던 한국 사회의 에너지를 어쨌든 그러모은 인물이 박정희라면, 한국 교회는 이 때부터 사회와 맺는 관계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박정희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을 도와 '에너지를 모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조용기의 순복음 교회가 부흥하고 여타 교회들이 그 흐름에 발빠르게 반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 교회가 '모으기만 한'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향후 한국 교회의 경직성을 강화할만한 보수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비록 민중(신자)들은 잘 살고자 하는 열망에 여전히 다이나믹 했지만, 바깥으로부터 굳어가는 콘크리트처럼 사회구조는 발빠르게 고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반대의 대표적인 예가 독일 교회이다. 독일 교회는 국가에 속한 기관으로서 굉장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한 역할은 어디까지나 사회와 국가 사이에서의 '중재'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역할의 연장선상에서 나치에 협력하는 교회와 저항하는 '고백교회'로 나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국소적인 양상으로는 매우 다이나믹했던 한국 사회를 바깥으로부터, 혹은 거시적인 차원에서부터 특정 형태로 가두고 고착화하는 작업에 협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으로부터 지금의 순복음교회의 건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성을 잃고 경직된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의 기묘한 동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배출되는 신자들로서는, 특히 87년 이후 사회 진출한 신자들은 한국 사회보다도 경직된 한국 교회의 실상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고, 여전히 그러한 충격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신자를 양산하고 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교회'를 찾아간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들 내면에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다. 기존 신앙과의 갈등을 벗어나고자 찾은 진보적 교회에서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는 조직구조의 문제와 부실한 위기관리 능력은 자신에게 내재된 '경직성이 빚어낸 이분법적 시각'을 소환해 낸다.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진보적 가치'에 대한 단 하나의 문제도 용납할 수 없는 무결성의 욕망이라 할 수도 있겠다. 기대를 품고 찾아간 공동체에서 맛보게 된 실망과 좌절은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기독교를 떠나거나 이전의 신앙으로 어쩔 수 없이 돌아가게 하는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한다.


그러한 개인들에게 건넬 수 있는 조언은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라'는 정도일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어느 모임/공동체/조직이든 문제라는 건 상존하고 중요한 건 문제해결/위기관리 능력이고,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당신이 추구하던 진보적인 가치가 틀린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단박에 느낄 수 있듯 이는 실망하고 갈등하는 개인들의 탓이 아니기에, 결국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힘써야 할 대상은 우리 모두이다.


당장 한국 교회의 경직성이 해결될 리 없고 어쩌면 한국 교회 소멸이 더 빠르겠지만, v보수적인v 한국교회에서 탈출한 우리가 내적으로 탈출해야 할 또 다른 감옥이 여전히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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