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가 부풀어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다."
- 누가복음 13장 20, 21절
윤리적이고 종교적으로 그려지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친숙한 (백인 남성) 예수와는 달리, 제자와 예수 공동체에 의해 기록된 예수는 경계를 어지럽히거나 무너뜨리고, 원형지어진 (Stereotyping) 신화를 비유로 넘어뜨리기를 즐겨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자(누가복음 7장 33,34절)요, 제가 아는 종교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을 기도하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세간의 오해와 달리 예수는 유토피아, 하느님 나라, 하늘나라를 뚜렷하게 그려준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하늘나라는/하나님 나라는 ~와 같다”는 식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맑스 초기에 맑스로부터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발견하려 노력하다 지금은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않는 게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첩경임을 발견하게 된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처럼, 오늘날 예수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청사진을 캐내려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태생의 미국 성공회 성서신학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작은 책 <어두운 간격>에서 우리의 세계관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틀짓는 신화Myth에 맞서는 무기로 예수가 비유(영어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신화는 국가와 제국이 신민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서사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뭉쳐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이러한 기존의 이야기에서 바람을 빼주고, 환기시키고, 뒤집고, 거리를 둠으로써 신화의 헛점을 폭로하거나 무력화시킵니다. 하지만 비유는 마냥 규칙없이 무한히 자유로운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비유 또한 규칙과 한계를 갖고 있는데, 단지 그 규칙과 한계를 극한까지 활용하여 경계를 드러내고 들이받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비유는 비유일 뿐, 하나의 비유는 그 쓸모를 다하면 다른 비유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는 성서 속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하나의 비유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각 비유가 하나의 핵심 주제로 관통되지도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얼핏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하나의 비유 속에서도 기존의 성/속 관념이 뒤섞이거나 혼란스럽게 비치기도 합니다. 이는 원래 의도된 비유의 특성이기도 하고 이천년이라는 시간차에서 발생하는 혼란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버나드 브랜든 스캇은 예수의 비유를 연구한 그의 책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다룹니다. 예수의 누룩 비유는 그 자체로 이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당혹감을 선사하는데, 하느님 나라가 누룩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누룩은 부패와 타락의 상징입니다. 빵을 만들거나 막걸리를 빚기 위해서는 필수이지만, 고대세계와 성서에서는 누룩이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고대에 주로 빵 만드는 일을 도맡았던 여성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이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밀가루 서 말이라는 상서로운 존재에, 누룩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누룩이, 거룩한 것을 부패시키고 잔뜩 부풀어오르게 만드는 바로 그 누룩이, 하느님 나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당시의 세계정세를 상기해야만 합니다. 이를 누락시킨다면 그저 반종교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인류 역사상 손꼽히게 강대했던 로마 제국과 그 밑에서 식민지로 살아남아 민중의 고혈을 짜냈던 헤로데 가문, 그들이 거룩하다고 깨끗하다고 숭배하는 대상에 스며들고 얽혀들어 더럽히고 부패시키고 잔뜩 부풀어올라 퍼져나가는 바로 그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무교절에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 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그 자신부터 누룩 있는 빵입니다. 무교절이 설정한 거룩의 한계는 제거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야말로 누룩이고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누룩의 존재는 먼저 현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대성(Modernity)의 핵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오롯이 단일한 원자로 존재하는 개인은 자본주의가 사고실험으로 상정한 세계에서나 가능한 허구의 존재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신유물론에서 강변하듯이 인간은 몸에 뚫린 곳곳의 구멍을 통해 들숨과 날숨으로 매 순간 온 세계와 자신 사이를 오가며 먹고 마시고 싸고 흘리는 존재입니다.
자본주의가 끝없이 자유롭게 써먹기에 딱 좋은 순수한 주체는 없습니다. 자본이 노동자를 압박하면 노동자는 이리 저리 새어나가 노동을 거부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편법을 저지르고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로 묶고 고정시키려는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 세상에게 이미 알게 모르게 누룩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맑스주의자인 존 홀러웨이는 “안에서-저항하며-넘쳐흐르는 존재”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탈아적이고 비동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향에 있어 반anti정체성주의적입니다. 단 한 순간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머무를 수 없기에,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서 저항하고, 그 저항의 몸짓 속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질문은 답을 찾아 - 새로운 질문을 찾아 - 걷게 만듭니다. 혹은 이리 저리 넘쳐서 흘러다닙니다.
극우의 온상이자 첨병이 되어버린 미국 개신교와 그 모습을 충실히 베끼는 한국 개신교는 은혜에서 은폐로, 열림에서 닫힘으로 나아가는 특별한 기술을 지니고 있습니다. SNS의 밈인 “열림교회 닫힘”은 하나의 모순적인 작은 해프닝이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열려있는 척 하면서 그 안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어떤 신학과 어떤 공동체와 어떤 정체성에 사람들을 가두는 우상숭배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제가 보고 배웠던 많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 “판을 뒤집기는 정말 어렵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예수를 따라 ‘판’보다 ‘이런 그림’을 뒤집고 싶습니다. 작고 꼬물꼬물한 저항과 투쟁과 변화를 향한 몸부림이 곧 바로 판 뒤집기이고, 혁명입니다.
우리가 판을 넓고 깊고 거대하다고 인식하는 한 그것은 절대 뒤집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게 흘러들고 스며들어 얽히고 물들이는 누룩이라면, 결국 밀가루 서 말을 부풀어오르게 합니다. 이런 누룩으로서의 삶이, 목표이고 목적이고 전략이고 전술이고 태도이고 사명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사흘만에 부활하고, 오늘도 한 아이로 이 세상에 끊임없이 다시 오는 예수가 증명하듯 “판은 이미 뒤집혔”습니다. 뒤집힌 판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예수 친구와 함께 누룩으로 살면 될 일입니다. 지쳐 쓰러지게 되더라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스며듦이 다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동료인 또 다른 누룩이 하느님 나라를 퍼뜨리기 시작할테니까요.
(그나저나 누룩 누룩 하니까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는군요. 예수 따라 한잔해 한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