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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의 향기를 맡고 싶어

<시간 불평등>, 가이 스탠딩

by 엔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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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자본주의 역사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교수가 전형적으로 아는 건 많은데 잘 풀어내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날도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번쩍 깨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세 시절에는 오늘날과 같은 노동 시간 개념이 없었다. 예를 들어 가죽세공업자라고 하면 며칠 바짝 일해서 물건을 넘긴 후 또 며칠은 술도 먹고 마을 여기저기서 놀다가 다시 일을 하는, 그런 일상이었다.


주 5일 근무가 아니라고? 아 아니 심지어 예전에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는데, 중세에는 며칠만 일하고 며칠은 또 놀았다고?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불과 몇백년 밖에 안된 자본주의 체제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자본주의적 주체인 나에게 이런 삶의 패턴은 큰 충격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서의 바울이 던진 말은 격언과도 같다. "일 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물론 진짜 바울이 쓴 편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울의 격언이 나온 사회적 맥락은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게으름"이란 "공동체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게으름"이지, 노동으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스스로가 잉여가 되는 게으름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주체들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하루 최소 8시간의 시간을 당연히 노동에 바쳐야 한다고 훈육되었고, 그 외의 시간은 노동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에 모두 소진되었다. 월요병도, 칼퇴도, 나아가 기술발전에 따른 플랫폼 경제의 성장도 "시간 부족"의 질환적 결과물이다.




노동이 신성하게 떠받들여지는 이유는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가 창출됨과 동시에 정작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자본의 흐름에 탑승하기 때문이다. 잉여가치 추출이라는 탐욕에 의해 전세계적인 수탈과 극단적 효율 추구가 벌어지며, 이 가운데 재생산이나 돌봄행위와 같은 부불노동은 은폐된다. 노동은 신성하되 노동자는 버려진다. 자본주의가 첨단화될수록 버려지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죽지 않기 위해 노동자는 더욱 더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가 사람으로 살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불평등을 해결해야만 한다. 거꾸로 시간의 불평등이 해결되려면 노동자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가능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가이 스탠딩은 자본주의적 주체들에게 숨겨져 있던 다른 시간 개념을 제시하면서 눈을 밝혀 준다. 우리는 게으름, 권태, 따분함을 견디지 못할 뿐더러 죄악시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원시(선사)시대에는 노동-일-여가-레크레이션이 서로 다른 의미였다.


"노동"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로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의 일로, 선사시대에는 사냥과 채집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일"은 고유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관심에 몰두하여 그것을 발현하는 행위다. 이는 여가와도 연결되는데, 그리스 사회에서 여가는 정치 참여 행위를 위한 축적의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색한 후 아고라에 모여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저자는 중세까지 이어지는 "일"과 "여가" 의 흔적을 공유지와 커먼스에서 찾는다. 영국에서 인클로저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공유지에서의 생산물을 각자의 필요에 따라 소유했고, 상황에 따라 다른 생산물과 교환하거나 부조(도움)하는 방식으로 공유지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했다. 이 때의 경영방식은 이윤이 아니라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지속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공동체마다 특유의 규율과 문화를 가지고 불평등이 영속되지 않도록 조율했다. 봉건 시대 장인들의 공동체인 길드도 좋은 예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주체들에게 노동과 일이 분리되어 여겨지지 못하고, 권태나 따분함을 느끼느니 숏츠로 탈출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현대 특유의 질환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고대와 선사시대의 선형적이고 반복적인 시간 개념, 그래서 계절이 오가며 순환하는 흐름은 현대의 단선적이고 진보적인 시간 홍수에 쓸려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 되뇌이지만, 정작 누군가에 의해 시간을 도둑맞고 있음은 알지 못한다.




늘 세상 돌아가는 모양에 불만이 많은 나는, 어느 때부턴가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어렸을때부터 평범한 삶의 궤적을 쫓는 일의 허망함, 자아실현의 욕구는 낭중지추처럼 솟아나는 목소리였다. 취업 불안정에 시달리면서는 더더욱 내가 하는 "일"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합치되기 어려웠고, "노동"은 "일"을 하기 위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최소 수단으로 그 의미가 쪼그라들었다.


나 뿐 아니라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과 일을 일치시키는 프리랜서든, 노동과 일을 분리하는 n잡러든, 다양한 방식의 탈주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고독 (고립이 아니다) 한 시간을 견디거나 누리게 되고, 권태로움이나 따분함과 친구가 되며, 색다르거나 창조적인 무언가에 관심을 두어 몰두하게 된다. 그 가운데 생겨나는 지향은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사회를 건들게 되고, 자본주의 체제는 이를 가장 싫어한다.


박근혜 정부의 전 비서실장 김기춘은 업무 지시사항으로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를 내세웠다. 비서실 내부의 지침이었다고는 하지만 소위 사회지도층이 세상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런 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길 위에 핀 꽃 한 송이의 향기를 맡는 것도, 따뜻한 햇살 아래서 아무 생각없이 멍때리는 것도 모두 무의미하고 게으른 짓이다.


하지만 인류는 아주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의 향기를 누리며 살아왔다. "시간이 돈이 되어" 시간을 팔아 돈을 사는 오늘날과 같은 무의미한 치열함이 세상을 가득 채운 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다시 우리의 시간들을 되찾고 그 향기를 맡기 위해 싸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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