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관심사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다.
예전에는 괜히 내가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 무게 잡는 것처럼 보일까봐 되려 얘기를 안했는데, 오히려 그런 마음가짐이 나를 고평가한다는 반증임을 깨달아서 조금씩 떠들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존 홀러웨이를 읽은 것을 계기로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탐색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읽은 <국가에 대항하는 마르크스> (스마다 소이치로) 도 굉장히 좋은 독서경험을 주었다. 덕분에 로자바 혁명과 사상적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 주제에 대한 독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 같다.
세상의 변혁이든 개혁이든 그에 대한 내 문제의식은 그거다. 함부로 범주화/개념화하지 않으면서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지키려는 투쟁이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무익하게 끝남이 없이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선, 결국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탐구와 제대로 된 타격이다. 국가든 사회든 정권교체든 그런 건 내게 부차적인 문제다. 어차피 나와 내 주변 싸우는 이들, 또한 전 세계에서 삶을 걸고 싸우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더 나은 삶이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의 대담을 담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주제처럼.)
내 주변에서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어디서 주워들은 정도이거나, 그마저도 속류맑시즘 내지 이미 폐기되어버린 풍문 수준의 내용인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가 오류가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현대의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비판이 마르크스에게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와 그를 둘러싼 논쟁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어렵지만, 그럴 가치가 차고도 넘친다.
마르크스는 결코 단순하게 경제라는 범주를 비판하지 않았다. 범주화 자체를 문제삼았고, 그 모순적 구성을 폭로했다. 그 모순은 우리를 둘러싸며 우리를 관통하고 있다. 숨쉬는 순간마다 우리는 그 드러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 있는 모순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지금 인류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마르크스는 초역사적 구원자가 아니다. (예수조차(?) 그렇지 않은데 마르크스가 그럴 리가.) 자본주의가 철폐된다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는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내부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철폐되지 않고, 그렇다면 새로운 세상도 열리지 않는다. 만약 그 외의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없애고 싶다면 인류가 멸절하면 된다. 인류의 멸절과 정확히 동일한 타이밍에 자본주의가 사라질 것이니까.
마르크스의 말처럼 모든 것을 의심할 때다. 모든 것에 질문할 때다. 의심과 질문 자체가 투쟁과 저항이며, 투쟁과 저항은 의심과 질문에서 그 힘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