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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거부한다

by 엔틸드


요즘도 배우는지 모르겠는데, 학창시절에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4대 의무가 시험에 나오곤 했습니다. 정답은 교육, 납세, 근로(노동), 국방(?!)입니다. 얼마 전 국회에서는 “근로자의 날” 명칭을 “노동절”로 바꾸었습니다. ‘근로’가 ‘성실하게 일한다’는 군사독재정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데 비해 ‘노동’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라는 주장이 관철된 것으로 보입니다.


1970년 11월13일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노동을 ‘신성하며’, ‘당연하고’, ‘해야 하며 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이자 누려야 할 권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런던베이글뮤지엄 노동자의 죽음과 쿠팡 새벽배송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공분을 자아내는 이유는 비단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의 의무와 권리’를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누구나 하고 싶을 때 노동할 수 있는 사회”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선동가들도 즐겨쓰던 레토릭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노동유연화”라는 단어로 집약되는 이 레토릭은 물론 노동자의 입장을 반영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가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상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한다“고 하지만, 그래서 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동 없이는 살 수 없고, “일 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며 노동의 가치를 추어올리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당연한 듯 살아갑니다. 하지만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외로운 삶 (개구장애 - 엘도라도)”이 싫었던 저는 도대체 노동이란 무엇인지, 노동을 하지 않으며 살 수 없는 것인지, 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노동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자본주의의 노동 개념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공동 창립자인 가이 스탠딩은 그의 책 <시간의 불평등>에서 우리의 노동 개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노동일과 노동시간”을 1차적인 전장으로 삼았던 맑스를 따라 스탠딩은 비자본주의사회와 현대의 차이를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의 분리 여부로 봅니다.


그에 따르면 비자본주의적이었던 고대나 선사시대는 시간이 선형적이고 반복적으로 작동합니다. 또한

노동(오늘날 자본주의 하의 소외된 노동)

일 (직업)

여가(정치적인 활동을 위한 권태와 창조적 축적)

레크레이션(오락)

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대학교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배우며 처음 들었던 중세의 시간과 비슷한 결에 있는데, 예를 들어 중세의 가죽공예 노동자는 주문이 들어오면 며칠에 걸쳐 일을 해서 납기를 마친 후 일요일을 포함한 휴일에 며칠이고 술을 마시고 즐기는 휴식을 갖고 다시 일을 하는 식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의 노동일과 시간을 통제하는 요소가 자본이 아니라 몇 개의 관계들이었던 것이죠.


이에 비하면 “자본의 축적”을 단 하나의 지상명령으로 삼고 돌진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러한 단순화를 위해 오히려 다른 요소들을 더욱 잘개 쪼개어 ‘분리’시켜 놓고,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단 하나의 동력인 ‘인간의 노동력’을 가동하기 위해서 그 분리된 수많은 요소를 통제하는 시스템입니다. 얼핏 자본주의가 그 어떤 사회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자본 축적에만 효율적일 뿐 실상 우리의 삶에는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일-여가-오락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직업(일)은 나의 적성이나 능력을 펼치기 위해서라기보다 우선은 먹고 살기 (노동) 위해 가져야하고, 여가는 다음 노동을 위한 준비이며, 오락은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서라기보다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제거하려는 목적이 더 큽니다.


한국인은 열심히 일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한국인의 노동시간이 이른바 선진국의 최소 조건인 OECD 국가의 평균에 비추어봐도 늘 최상위권에 위치해있음은 이제 상식입니다. 내란범 윤석열 정권 시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시간을 늘리려고 시도했던 이유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열심히 일하도록 (근로) 장려하는 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근로장려금이라는 제도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물론 금액이 쏠쏠짭짤합니다만.)


그런데 이렇게 하루 하루를 바쳐 평생에 걸쳐 열심히 일하는데도 우리는 매 순간 삶의 질이 내리막을 걷고 있다고 느끼고, 주류경제학의 지표로도 쉽게 증명됩니다.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는 어느새 상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전세계적으로도 공통되며, 가이 스탠딩은 노동을 신성화하는 노동주의를 채택한 것이 좌파의 실책이라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을 신성시하는 방식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여기서는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자)에서 프레카리아트(여기서는 불안정적인 비정규직, 임시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사태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오랜 노동 개념


자본주의의 노동 개념은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전체 인류사에서 한 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류사에는 아주 오래도록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비축에 만족하던 시대와 지역이 있었습니다. 인구가 적어서였든, 수렵이나 채집이나 생존 방식을 택할 여유가 있어서였든, 가이 스탠딩의 주장처럼 삶이 노동에 지배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라스코 동굴에 벽화가 그려진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죽고, 개인적인 시간조차 다시 노동하기 위한 재생산의 시간으로 바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사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현상이며, 일상 전체가 노동을 중심으로 노동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특유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대대로 인류가 행했던 노동이 “먹고 살기 위한“ 행위였음은 물론이지만, 이는 ”의식주를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 행위였지 ”음식과 옷과 집으로 교환할 화폐를 모으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피부에 닿을만한 가까운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품앗이’가 그것입니다. 농사든 가축을 키우든 집을 짓든 마을 내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이웃이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투여해서 노동을 하고, 그 댓가를 화폐로 교환하는 게 아니라 이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해졌을 때 기꺼이 도움을 요청하는 ‘관계적 자산‘으로 삼는 전통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노동은 능력, 여가, 관계 등의 요소와 동등한 위치에서 얽혀서 영향을 주고 받는 one of them의 요소일 뿐입니다.



노동을 거부한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근원적인 힘은 노동 거부에 있다고 역설합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든 여기에서 거부되는 노동은 자본주의적 노동, 노동력을 판매해서 자본에 잉여가치를 부어줌으로써 이 잘못된 체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노동입니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노동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른바 보수신문에서 심심하면 때려대는 “파업으로 인해 국민 대다수가 감수해야 하는 불편”이라는 레토릭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파업(노동 거부와 중단)의 목표가 임금 인상이든, 인원 충원이든, 노동조건 개선이든, 파업은 노동자의 강력한 무기이며 오히려 어떤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파업으로 동조하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들의 노동이 우리의 노동과 이어져있기 때문입니다. 품앗이의 자본주의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말도 안되는 2024년 12월 3일의 내란 책동을 진압하러 나선 주권자 한국인들은 그 와중에도 퇴근 후에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그 와중에 SNS상에는 “시위는 당연히 결근(차업)하고 나가야하는 거 아니야?”라며 의아해하는 어느 외국인의 일화가 파다하게 퍼져나갔습니다. 한국인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자본주의를 선택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에, 시위와 파업이 자연스러운 공산/사회주의적 전통을 가진 지역에서 사는 그가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동조합 출신으로 바뀌고, 쿠팡의 경영자가 국회에 불려나와 공개적으로 혼이 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적극적으로 시행되고, 노동조합에 말도 안되는 배상금을 청구하는 기업경영자의 막돼먹은 짓을 방지하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어도, 우리가 자본주의 속에서 사는 이상 노동자의 궁극적인 무기가 노동 거부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프리랜서든, 심지어 “사장님”으로 불리는 개인사업자이자 소상공인이든, 우리의 노동이 자본축적을 위한 잉여가치를 낳고 이를 보존하는 데 기여하는 이상, 우리는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존재만으로도 자동 투쟁모드”에 돌입해있는 것입니다. 근로(열심히 일함)로서의 노동이 당연해지는 만큼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리듬에 맞춰 키보드를 두드리는 당신의 작은 월급루팡적 노동 또한 당연합니다.


우리가 단 한순간이라도 노동을 멈추고 아니, 자본주의적으로 노동하기를 멈추고,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을 할 때마다 흘러넘치는 내 존재의 잉여들을 건져내어 내가 놓치고 있던 나를 돌보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사노동을 ‘집안일’이라며 무시하는 동거인을 향해 노동을 거부하고, 잠시라도 오롯이 자신을 위한 돌봄노동에 힘을 쏟으면 좋겠습니다. 공적으로 강요되는 지식노동을 거부하고 내가 궁금한 것들, 디깅하고 싶은 것들을 향해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거부하는 수많은 노동들 속에서, 도리어 바로 그 속에서 우리가 찾던 활동들Doing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을 거부함으로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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