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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과위생사 도비 Apr 26. 2023

#2 우연에서 멈출 것인가? (7)

이별? 오히려 좋아.

헤어질 운명이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별은 우연이었다. 


앞서 작성했던 글들을 통해 파악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특별히 계획이나 노력을 하며 사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면 되는대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삶에서 유일하게 내가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던 것은 그와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 쏟은 결과가 이별, 실패라니. 

역시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좌절하고 울고 있는 동안 시간은 야속하게도 멈춰서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고, 그렇게 나의 20대를 모두 소진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힘들 땐 진리처럼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20대가 끝나기 전에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것을 다짐하며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말자는 오기를 품게 되었다. 

새로운 연애를 꿈꾸며 또 지난 사람을 잊기 위해 나는 운동에 내 시간과 신경을 쏟았다.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나의 실패가 문득 떠올라 나를 잠식시켰기에 다른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 와중에 그게 논문은 아니었다는 것이 아쉽긴 하다.)


마침 친척언니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필라테스 센터를 열었고, 운동할 겸 자전거로 센터에서 집까지 이동하고 1:1로 필라테스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체중에는 큰 변화가 없어도 스스로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살 빠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왼쪽이 필라테스 시작 전, 오른쪽이 필라테스 후


그냥 운동하는 거 인증하려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라인이 달라졌음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라인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성공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다시 매끄러운 라인에 여러 요철이 생기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는 요철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였지만, 진지하게 시작했던 연애에 비해 훨씬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관계도 현재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오고 있고 앞으로 해나갈 결심을 하고 있는지. 결과에 상관없이 나를 응원해 주고 대단하다며 칭찬해 주는 상대를 만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여러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찾아온 이별이었지만,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꽤 괜찮은 상대를 만나기도 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감과 사랑으로 꽉 채워진 나는 다시 졸업을 위해 히로시마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남은 건 졸업뿐.

완성도 높은 졸업논문은 아니었지만, 그런 역경이 있던 와중에 완성해 낸 논문이라 뿌듯함도 있었다. 

그렇게 자아도취하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작성한 졸업논문을 발표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표는 대본을 읽어가며 어찌어찌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질 교수님들의 질문세례였다. 먼저 졸업한 일본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 질문 시간이 가장 두려운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꼼수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교수님들이 영어를 잘하시지만, 모국어인 일본어에 비해 영어로 하는 질문은 그렇게 날카롭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발표를 영어로 하기로 정했다. 


그런 나의 예상은 다행히도 적중했다. 어쩌면 나의 논문의 완성도가 낮아서 그렇게 예리한 질문을 할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발표를 마쳤다는 데 의의를 두자.

발표하는 모습은 히로시마 대학의 연세가 많으신 여자 교수님께서 촬영해 주셨는데, 발표를 마치고 나서 확인해 보니 초점이 다 나갔다며 미안해하셨다. 

그렇지만 이 초점 나간 사진마저 없었더라면, 나에게 남는 것은 졸업 증서뿐이었을 것이다. 

자신감으로 충전된 나는 모든 상황이 감사하기만 했다. 






다시 돌아간 히로시마에서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 생활 청산도 준비했어야 했는데, 무계획 무대책인 나는

'아 몰라. 일단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그 많은 가구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인 친구들은 이미 졸업한 상태였고, 아르바이트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히로시마에서는 거의 대화할 일이 없었다. 그 쯤 다행히도 '클럽하우스'라는 보이스채팅 어플이 유행했다.

잠도 안 오고,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그리워질 때 클럽하우스에 접속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듣고는 했다. 

클럽하우스는 이야기를 하는 '스피커'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리스너'로 나뉘어 있는데, 리스너 가운데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손을 들면, 그 대화방의 운영자가 대화에 참가시켜 주는 형태로 운영됐다.

나는 내향형 인간이기에 '리스너'로만 참여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자주 참여하다 보니 스피커 중 한 사람이 같이 대화하자며 초대했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참여한 그 대화를 통해 연예인들과 이야기해보기도 하고 다양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과 인연이 생기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재일한국인 '공대유' 배우님과 알게 된 것이 나에게는 신의 한 수였다. 그는 일본과 한국을 자주 오갔기에 일본의 당근마켓 격인 '지모티(ジモテイー)’라는 어플을 통해 가구들을 정리해 볼 것을 추천해 줬다. 

한국에서도 대형폐기물을 신고하고 내놓지만, 일본에서는 그 절차가 더 까다로웠다. 우선 아무 날에나 버릴 수 없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2주에 한 번만 내놓을 수 있었고 우선 인터넷으로 대형폐기물을 신고해야 한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대형폐기물을 신고했다는 스티커를 구입해야 했으며, 편의점에서 대형폐기물 폐기 비용을 지불하고 지불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스티커를 받아 폐기물에 붙여야 했다.

하나를 버리는 데 세 기관의 협력이 필요하다니. 

급하다 급해 한국 현대사회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폐기하는 비용도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모티를 통해 무료 나눔을 하면 1년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은 거의 새것과 같은 가구들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가서 쓰면 돼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파티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떠나기 직전까지 나에게 필요한 가구들을 전부 사용하다가, 내가 떠나기 직전에 모든 가구들을 처분하고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7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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