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먹을 곳이 없다면 만들면 되지!
일본에서 돌아온 내가 돌아갈 곳은 역시 치과 임상뿐이었다.
요즘에는 한 건물에도 치과가 2~3개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치과가 여기저기 많다.
그 이야기는 내가 취직할 치과도 그만큼 많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유학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집에서 가까운 치과, 연봉을 많이 주는 치과, 근무조건이 좋은 치과를 우선으로 검색해 취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유학을 통해 배운 것을 써먹을 곳이 필요했다.
내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은 구강기능재활인데, 그중 나는 노인 구강기능재활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노인 구강기능재활을 임상에 접목시킬 수 있는 터를 찾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치과는 대부분 구강 내 발생한 질병을 치료하는데 집중을 하고 있다.
질병이 생기기 전에 예방을 집중해서 시행한다는 치과는 찾아보기 드물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렇게 사후처리식 진료가 이뤄지는 데에는 환자와 치과, 모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강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치과에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요즘엔 그나마 스케일링이 1년에 한 번 보험 적용이 된다는 것이 알려져 1년에 한 번 꼴로 치과에 방문해 스케일링과 검진을 받는 환자의 수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무언가 치료 행위를 받기 위해 치과에 내원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나의 구강건강 상태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질병이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예방이나 관리에 대한 환자들의 니즈가 없다 보니, 치과에서는 예방과 관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니즈가 없다고 해서 예방과 관리의 중요성을 교육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소홀히 한 것은 치과가 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들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예방이나 관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일을 더 만들기 싫다는 이유로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치과 종사자들의 소홀한 태도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모르는 치과 종사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임상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꼭 필요한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치료를 보류하는 환자들도 꽤 많다.
이미 치아가 너무 많이 썩어서 깨지다 못해 부러져버린 치아로,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상태임에도 뽑기를 거부하는 환자들도 왕왕 있다.
아마 그 이후 단계가 임플란트 식립이기 때문에 비싼 치료비에 부담을 느껴서 망설이는 것일지 모른다.
아픔도 불사하고 돈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질병이 생기지도 않은 상태에서 예방에 돈을 쓰라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잘 알기에 내가 취직할 치과가 어느 동네에 위치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자기 관리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딜까.
내 생각에는 '잠실'이 그런 동네 중 하나였다.
송파구는 집값이 높은 편에 해당하는 동네이다. 그리고 동네에 영화관, 백화점은 물론 한강과 올림픽공원, 석촌호수 등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잠실에 사는 사람들은 문화생활, 여가생활도 즐길 정도로 경제적 여유, 심리적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잠실에 위치한 치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력서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로 구강기능재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표현했고, 실제로 면접까지 이어진 경우에는 원장님께 혹시 구강기능재활을 임상에 적용해도 될지를 여쭤봤었다.
여러 치과에서 면접을 봤지만, 대부분의 원장님들께서 구강기능재활에 대해 모르고 계시거나 관심이 없었다.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원장님의 경우에도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이야기하는 구강기능재활과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경우도 많았다.
임상에 구강기능재활을 접목시키는 일은 아직까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낙담하던 순간,
한 치과 원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구강기능재활이 뭔지 솔직히 잘 몰라요. 그렇지만 임상에 적용하는 것은 찬성이에요.
대신 진료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치과의사인 나에게 있으니, 구강기능재활을 환자에게 시행하기 이전에 나에게 먼저 설명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너무 멋있는 치과의사, 원장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이 분야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꼭 치과계가 아니더라도 '모름'을 인정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치과의사와 치과위생사는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수직적인 관계로 진료실에서 협업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치과위생사가 아는 내용을 치과의사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원장님들을 생각보다 만나기 어려웠다.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치과위생사가 배우고 왔다고 하니 그 지식에 대해 깎아내리기에 급급한 원장님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모른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시면서, 법적으로 진료의 책임이 치과의사인 본인에게 있으니 먼저 알려달라는 원장님은 정말 처음이었다.
구강기능재활이 아니더라도 이 치과 원장님과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잠실새내역 주위에 있는 치과에 취직하게 되었다.
역시, 같이 일하며 보게 된 원장님의 모습은 너무 멋있으셨다.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내뿜는 포스가 있었다. 그리고 진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임하시고 계시기에, 거의 모든 진료의 완성도가 100%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자신이 없는 진료는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고, 더 잘하는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하는 것도 환자의 구강건강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구강기능재활에 대한 내용을 환자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원장님의 진료 방식에 적응하고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과 손발을 맞추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1~2개월은 적응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원장님, 그리고 치과위생사 선생님들과 손발을 맞춘 뒤에 나는 본격적으로 구강기능재활의 씨앗을 진료실에 하나씩 심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환자들에게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치통으로 인해 치료를 받으러 내원한 환자에게 뜬금없이 구강 기능이 약화돼 있으니 재활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걸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우선 대기실과 치과 진료실에 사용할 교육자료를 먼저 만들어 보기로 했다.
환자가 진료를 기다리는 중에 구강의 기능에 대해, 정확히는 구강에 위치한 근육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인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함께 일하는 치과위생사 선생님들도 나의 이런 활동들을 제지하거나 눈치를 주지 않고 응원해 줬다. 어떻게 생각하면 안 그래도 바쁜 치과에서 일을 더 만들어내는 것인데도 뭔가 하나씩 할 때마다 너무 재밌다면서 동참해 주셨다.
정말 너무나도 완벽한 직장을 찾은 것 같았다.
출근길에 어지럼증을 느끼기 전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