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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 Jun 28. 2020

그건 내가 아니라, 체력한테 물어야지

여행이라는 것은 묘한 구석이 있다. 떠나기 며칠 전엔 디데이(D-DAY)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막상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여는 그 순간부턴 몸이 무거워진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 때문일까. 걱정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극단적인 상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를 테면 버스를 놓쳐, 길을 헤메다 강도를 만나 여권이나 현지 화폐를 모두 도둑맞는 그런 상상. 혹은 비행기를 놓친다거나, 비행기가 연착돼 공항에서 노숙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위. 언어가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하는 불안따위. 기대와 초조한 감정 사이를 오가며 나는 혹시 놓고가는 물건이 없나, 방을 다시 한번 살핀다. 힘들게 싼 캐리어를 다시 풀고,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잘 챙겼는지 점검한다. 발걸음은 무겁지만, 애써 태연한 척 부모님에게 잘 다녀오겠다라는 인사를 한다. 부모님도 나만큼 걱정하고 있지만, 서로가 그런 표정은 숨긴 채, 마치 잠시 외출하는 자식 대하듯 덤덤하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한다. 이것이 혹 마지막 인사는 아니겠지? 하는 걱정을 최대한 잊으려고, 나는 마음을 다잡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다잡으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 신치토세 공항편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출발 지연이 되었다는 방송이 나왔고, 나와 함께 동행한 애인은 예상했다는 듯이 노숙할 짐을 풀었다. 하필 늦은 밤 비행기로 예약했던 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변경된 출발 시각이 새벽 6시라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공항에서 노숙하는 것이 그 상황에선 현명한 판단이었다. 보통 비행기가 연착되면, 게다가 그 시간이 늦은 밤 중이라면 승객들 대부분이 공항에서 노숙을 한다. 또한, 기상악화는 한 지역을 국한해서 벌어지는 게 아닌 터라, 특히 다수의 일본행 비행기는 연달아 뜨지 못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정도가 되면 공항 내 노숙 승객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편히 쉴 의자 역시 한정적이기 때문에, 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캐리어를 배게 삼아, 맨 바닥에 누워 노숙할지도 모름을 감안해야 한다. 결론은 일본행 비행기 모두 기상악화로 이륙하지 못했고, 저마다 여행으로 부푼 기대를 갖고 있던 승객들은 일사분란하게 의자를 찾아다녔다.


현명한 애인은 공항 내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내 팔을 붙잡고선 어디론가 빠르게 걸었다. 다른 승객들은 카트에 몸을 반을 걸친 채, 흐느적 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도대체 어딜 그렇게 급히 가냐고 따지듯 물었는데, 애인은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조차 답답하다 여기는 듯 살짝 내쪽을 흘겨 보곤 질문엔 대답할 기미 없이,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나는 비행기 출발 시각이 새벽 6시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순응하고,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겠다라는 판단을 모두 마친 뒤에 초조한 마음을 반쯤 정리할 때, 여자친구는 이미 노숙하기 가장 좋은 의자를 선점했고, 그곳엔 마침 두개의 콘센트가 있었는데, 애인은 능숙하게 그 콘센트에 외장용 배터리를 충전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는데까지 수 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 때, 애인은 단 몇 초 만의 순응과 판단을 마치고, 최선의 선택을 해냈다는 것이다. 새삼 집나오면 개고생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도, 남자 옆엔 꼭 현명한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봤다.


 : 새벽 6시에 출발하면, 도착 시간이 오전 아홉시 일텐데, 체력이 버틸까?

애인 : 그건 내가 아니라, 체력한테 물어야지.



다음 이야기는 결국 버티지 못했던 체력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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