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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Mar 24. 2022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 (2021)]

《Arsène Wenger: Invincible》

이 글은 국내 유일의 OTT 미디어, <OTT뉴스>에 3월 16일 자로 기고된 글입니다.

"제게 축구는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가끔 두려울 때도 있어요. 어느 한 곳에 인생을 전부 바치는 건 꽤나 겁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분명 제 인생을 전부 바쳤습니다."


 무언가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패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세우며 아스널의 황금기를 이끈 아르센 벵거. 승패와 성패를 모두 겪은 벵거가 드러내는 우울하고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이다.

감독: 가브리엘 클라크, 크리스티앙 장피에르 

장르: 다큐멘터리

개봉: 22. 2. 25.

시간: 95분

연령제한: 전체관람가

국내 관객 수: 왓챠 개봉


이후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을 보고 있다. 스크린에는 데니스 베르캄프의 놀라운 골 장면과 티에리 앙리의 셀레브레이션이 나오고 있다. 그 남자는 같이 웃는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듀틀렌하임, 도시가 아니라 마을이라고 불러야 하는 조그마한 시골에서 아르센 벵거 감독은 나고, 자라고, 생활했다. 프로선수로서 활약하지 못하자 대학 석사 학위와 지도자 교육을 동시에 받으며 감독으로 성장했고 낭시와 AS 모나코를 거쳐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 리그 앙의 승부조작 논란으로 인해 축구계에 신물이 나며 잠시 동안 축구를 멀리하다가 일본 J리그로 깜짝 복귀하며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아르센 누구?(Arsene who?)"라는 기사 ⓒ telegraph.co.uk

 그렇게 컴백한 클럽은 잉글랜드의 아스널. 아스널은 창단 첫 외국인 감독으로 벵거를 택했고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감독, 요한 크루이프가 올 것이라 기대했던 아스널 팬들은 “아르센 누구(Arsène who)?”라며 벵거를 농락했다. 축구와 거리가 먼 듯한 왜소한 체형과 멀끔한 패션은 “학자” 혹은 “교수”라는 이미지를 줬고 벵거에 대한 초기 여론은 대개 부정적이었다. 식습관을 바꾸고 담배를 뻑뻑 피우던, 소위 “거친 맛”의 잉글랜드 축구가 벵거를 만나 모두 금지당했으니 어떤 경우로든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널과 벵거의 역사적인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벵거 감독이 부임하기 전, 아스널은 사실상 “콩가루 집안”이었다.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고 선수들과 감독 간의 신경전 때문에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감독들은 농락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섬세하고 세심한 방법으로 선수단을 케어한 벵거 감독은 곧바로 성적으로써 본인을 증명했는데 98-99 시즌, FA컵과 리그 우승을 동시에 일궈내면서 구단 역사상 두 번째 더블을 기록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경과 비교되기 시작했는데 그맘때쯤, 벵거 감독의 독보적인 업적이 탄생한다.

03-04 아스널의 무패우승 시즌 ⓒ goal.com

 02-03 시즌, 리그 우승을 일궈낸 다음 시즌, 벵거 감독은 뜬금없는 말을 한다. "올 시즌에는 패하지 않겠다"라는 현실성 없는 말을 한다. 당연히 영국 내에서는 '정신 나간 소리'라고 공격당했고 해당 시즌에는 무려 6번이나 패하며 리그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03-04 시즌, 퍼거슨의 맨유까지 버텨내며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 무패 우승을 일궈낸다. 이는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 무적(Invincible)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업적이었다.


 그러나 벵거 감독은 퍼거슨과 달리 정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열악했던 하이버리 스타디움 대신 새 경기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완성시키는 프로젝트를 두고서 벵거를 아스널로 데려온 데이비드 딘 부회장이 마찰을 빚으며 사임을 표했다. 벵거 역시 아스널을 떠나려고 했으나 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이적 대신 재계약을 택한다.


 하나 이는 애증 어린 사랑의 서막이었다.

공사 중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과 아르센 벵거 감독 ⓒ sportsbible.com
"하이버리 [스타디움]는 제 영혼이었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는 제 상처였습니다."


 경기장 신축으로 인해 재정적인 제한이 있었던 아스널은 기존의 핵심 선수들을 헐값에 매각해야만 했다. 무패 우승의 주역이었던 선수들은 줄줄이 아스널을 이탈했고 그 사이에서 혼자 남은 벵거 감독은 어렵사리 팀을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성적은 이전만큼 좋을 수 없었고 그에게 존경을 표했던 구너(Gooners, 아스널을 응원하는 팬들을 지칭하는 말)들은 "벵거 아웃"을 외치기 시작했다. 홀로 버티던 벵거 감독은 22년 만에 결국 아스널을 떠나게 되었다.


 사랑해서 떠나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아스널의 벵거 감독이 아녔을까. '무패의 전설'이라는 엄청난 위업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멘터리는 벵거 감독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다. 아스널 팬이라면, 또 축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감정적인 동요 없이 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팀을 떠나는 과정을 회상하는 벵거 감독의 모습으로부터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무패 우승이라는 뛰어난 업적 이후로 벵거 감독은 아스널을 떠날 것을, 정말 많은 클럽들에게 권유받았다. 이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지만 현지 언론의 추측성 기사에 따르면 퍼거슨 감독의 후임으로도 꼽혔고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등 당시 내로라하는 클럽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벵거 감독은, 정말 처음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제의를 받았다”라고 말한다. 맨유에게서 2번, 이미 이 말부터 충격적이었다. 맨유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다양한 곳에서 제의를 받았지만 결국 잔류를 택했다. 그리고 이를 두고 벵거 감독은 후회한다고 말한다.

아르센 벵거 감독의 마지막 ⓒ theguardian.com
"저의 결정적인 단점은 지금 있는 곳을 너무 사랑한다는 거였어요. 당시에 있던 곳 말이에요. 하지만 당연히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항상 슬픈 법이죠."


 이 사랑은 무려 22년이 걸렸다. 딸과의 관계는 빠르게 서먹해졌고 아스널과의 관계 역시 무패 우승 이후로 천천히 서먹해졌다. 퍼거슨과 맨유처럼 벵거도 아스널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벵거 감독은 ‘사랑하는 만큼 거리를 두겠다’라고 말할 정도다. 22년 동안 행복한 이야기만 있었던 게 아녔다. 모든 러브스토리가 그러하듯, 벵거와 아스널도 달콤했던 시간과 쓰디쓴 시간, 모두 공유했다.


 타이틀은 “무패”와 “전설”에 포커싱 되어 있지만 실상 벵거 감독의 슬픈 회고록이다. 그의 자서전에도 뚝뚝 묻어나는 특유의 “블루”가 다큐멘터리에서는 더더욱 잘 드러난다. 벵거 감독의 표정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여전히 “레드 앤 화이트”, 아스널 그 자체다. 그렇기에 그가 전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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