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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Feb 14. 2023

가끔 운이 좋게 지하철 문은 두 번 열린다 外

영겁의 사랑


난 어렸을 적부터 니체를 좋아했다. 옆의 짝꿍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 친구는 날 아직도 이상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니체를 좋아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는 신이 죽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톨릭인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난 니체의 심정을 200% 이해한다. 사랑이라는 운명에 빠져서 부유하고 유영하게 했음에도 결국 그 운명을 눈앞에서 놓쳤다. 불행의 끝자락 속에서 니체가 말한 건 영원, 그리고 사랑이었다. 어차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되는 슬픈 인생이라 해도 니체는 짤막한 행복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신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평생을 실연에서 회복하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을 거부당한 이후,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글과 정신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나는 그가 죽고 싶어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음으로써 조금 더 빨리 운명의 사랑을 위해 회귀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연인이었던 루 살루메는 니체의 죽음을 통해 한 차례 더 유명해지며 ― 물론 그 당시에도 유명한, '프리 마돈나'와 같은 삶을 살았지만 ― 부귀영화를 누렸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의도는 알겠지만 심정은 모르겠다. 항상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지만, 내가 지금 견디지 못하니 결국에는 신이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그런 심정이었다면 나도 동의한다. 내가 사랑한 이들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지독했던 첫사랑 이후로는 내 사랑은 기형적이었고, 이후로부터 나는 사랑을 갈구했다. 선택받을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역시 사랑해 주길 바랐다.


지금의 내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평소에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해봤다. 온종일 술만 먹어보기도 했고, 숨이 멎을 것처럼 뛰어보기도 했다. 평소에 안 읽어보는 책을 읽기도 했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클럽에서 혼자 떠돌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면 나를 부정하는 게 맞겠지. 신을 부정하는 니체처럼 나도 ‘남 탓’을 하면 되는데, 그러기엔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스스로 나를 죽여야만 했다.


이전에는 내가 당신을 이렇게 좋아한다, 그러니 내가 더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설득하고 말해왔지만, 나는 무엇 하나 당신에게 좋은 옵션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놓으면 놓아질 거 같은 관계, 내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혐오하는 사이가 '우리'로 되었다는 생각은 또 한 번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


아직도 벗어나고 정리하는 과정을 스스로 밟고 있다. 사랑 때문에 눈물이 메말랐는데, 3년 만에 흘러넘치고 있다. 내 마음처럼 가득한 슬픔이 이유 모를 순간들마다 쏟아지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참 별 것도 아닌 짝사랑인데, 목멜 필요가 단 하나도 없는데, 대체할 만한 마음의 보금자리를 못 찾고 있다. 홈리스처럼 떠돌고 천사 급식소 같은 데서 사랑을 찾는, 뭐 그렇게 됐다.

 

쓸쓸한 일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심한 꼬라지다. 병신 같은 게,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항상 후회할 사랑을 한다. 요새 내 일상은 후회의 반복이다. 입에 거미줄 치는 일상 덕분에 당신이랑 했던 즐거운 대화를 곱씹으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당신이 없는 게 내 삶의 싱크홀 같다. 채워지는 거 하나 없이 비어버린 나머지, 또 당신이 채워줄 수 있을 거란 머저리 같은 희망고문으로, 니체가 말하는 '영겁의 사랑' 따위를 외치며, 부끄러운 글을 쓴다.


23. 2. 4.

가끔 운이 좋게 지하철 문은 두 번 열린다


가끔 운이 좋게 지하철 문은 두 번 열린다. 뭔가가 끼었거나,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열어준다. 놓치지 않기 위해 뛰었지만 코앞에서 문이 닫히면 억울하다. 내가 늦은 잘못인데, 원망은 다른 쪽을 향한다. 그러다 운이 좋게 열리면 기쁘기 그지없다. 그럴 땐 마치 선택받은 것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내 마음은 미개발 지역이 아녔다. 상처와 슬픔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걸 억지로 막아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숭숭 뚫려버린 구멍들을 메워내지 못한 채 견디는 게 일상이었던 나에게 그 사람은 재개발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공허했던 나에게 그 사람은 최고의 안식처였다. 근래 나의 행복은 모두 그 사람에게 있었다. 나의 믿음과 사랑은 굳건해질 때쯤 그 재개발이 희망고문이란 걸 알게 됐다.


사실 을의 입장에선 간택 혹은 선택밖에 없다. 전자는 가능성이 없고, 후자는 희망이 없었다. 그래도 남아있는 자존감 혹은 자존심이 나를 선택해 달라는 어필을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곧 거만함 혹은 간절함으로 바뀌어 고백으로 이어졌다. 득점 인정이 되지도 않았는데 고백이라는 세리머니를 했고, 당연히 골이 취소됐을 때 나는 슬퍼했다.


이 역시 누구 탓할 것이 아니다. 명백히 내 잘못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심판에게 항의하듯이, 나도 나 스스로의 질문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물어봤다. 결국엔 달라지는 게 없으면서도.


가끔 운이 좋게 지하철 문은 두 번 열린다. ‘운이 좋게’라는 것은 사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과 같은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문이 두 번 열리기를 고대한다. 어쩌면 열리지 않는 반대 문일지도 모르는데, 애처롭게 그 문만을 바라보고 있다.


23. 1. 25.

나는 더 이상 낼 용기가 없다


양심통이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내가 말해도 참 우습다. 내 도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어딘가 그렇게 아팠고, 그래서 거짓말을 잘 못한다.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날 뿐만 아니라, 어딘가 허술해지는 알리바이에 결국엔 탄로 난다. '후회할 짓을 안 하자'의 모토가 됐던 것은 거짓말이었고, 선의와 악의를 떠나서 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괜찮은 척도 잘 못한다. 괜찮은 척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이 끝내 알아보다 보니 어딘가 힘들 지경이면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일종의 자기 방어였다. 상처를 나눈다 한들 나는 본연의 아픔까지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예민하고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니까, 어떻게든 티 내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척을 한다면, 좋아하지 않는 척을 해볼까 한다. 망쳐진 이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척을 해보겠다. 한때 나는 연기도 도전하고 싶어 했고, 적어도 이 연기는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2023년 들어 매 순간 혼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연락에 심드렁한 척해보겠다. 당신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아 보겠다. 당신이 던졌던 수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않겠다. 나와 함께 있었던 순간들에게 행복을 느끼지 않겠다.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에게 장난을 쳐보겠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나 메시지를 기억하지 않아 보겠다. 이게 나에게 필요한 노력이라면, 일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보겠다.


내 다짐은 이 정도가 됐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몰라줄 테지만, 나는 이렇게까지 치우쳐졌다. 나는 더 이상 낼 용기가 없다. 당신에게 변한 나를 봐달라고 말할 용기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용기도, 일상적으로 연락할 용기도 없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연락할게'라고 말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용기였는데 그게 이미 짓밟혔다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낼 용기가 없다. 용기도 없는 병신은 생각만 많고, 그 생각이 나를 좀먹은 지 한참 됐다. 지랄 맞은 짝사랑 같은 건 다시는 안 한다 했는데, 결국에 요 지경인 거 보면 나는 정말 병신이다. 자격도, 용기도 없는 나는, 더 이상 당신이 보고 싶지 않다, 고 말해야겠지.


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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