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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33 휴머니즘

휴머니즘

  그때까지만 해도 쿠바 사람들은 진짜 혁명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으로, 혁명이 손끝에 닿았다고 믿었다. 아쉽게도 쿠바 혁명이 일어난 1959년은 냉전이 물처럼 끓던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때 소련에 무기까지 지원하며 함께 싸운 동맹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동유럽으로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미묘해졌다. 유럽은 공산주의 사상의 본거지였다. 그런 유럽에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정권이 잇달아 수립되었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도 왕정을 닫고 공산주의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소련의 진영이 확장될수록 미국 진영은 위축하고 있었다.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10년 전 한국전쟁을 앞두고 둘은 적대적인 진영으로 갈라졌고 대결이 시작되었다. 1956년 흐루쇼프는 유럽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모두 패망시킬 것이라고 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소련이 미국을 놀라게 했다. 공산주의가 세계 최초로 ‘여행자’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1960년 미국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 곳에서 정찰하다 대공미사일을 맞아 격추당했다. 생존한 조종사가 체포되었으므로 미국은 정찰을 시인해야 했다. 망신이었다. 두 강대국은 2차 대전 뒤 갓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상대로 서로 동맹을 확보하며 진영경쟁을 전개했고 세계는 양극화했다. 약소국으로서는 어느 편이든 두 강대국 중 하나의 우산에 속하는 편을 선택해야 했다. 그것이 차가운 전쟁 시대의 논리였다. 두 나라의 대결이 끓어올랐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로 미국은 큰 안보 위협을 느꼈다./연합뉴스

  피델은 어느 쪽 우산 아래로도 들어가지 않고자 했다. 미국을 직접 경험해 온 쿠바는 미국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피델은 연설할 때마다 쿠바는 자본주의의 배고픔도 원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공산주의도 원치 않는다고 했다. 혁명 쿠바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가운데로 난 새로운 길을 걸을 것이라고 했다. 양극화 시대가 쿠바 혁명에 어느 이념에 속할 것인가를 요구한다면 쿠바는 오직 휴머니즘에 속할 것이라고 했다. 쿠바 혁명은 “빵이 있는 자유를, 억압당할 두려움이 없는 빵”을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쿠바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념ism’이라고 했다. 피델이 요리조리 대답을 잘 회피해 갔지만, 점차 그 답을 요구하는 내부의 압력도 높아지고 있었다. 혁명 정부의 첫 대통령 우루티아도 결국 공산주의에 대한 문제로 사임했다. 또 7.26 운동본부 출신 장관도 내각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며 이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화가 난 피델이 그를 반역죄로 체포했다. 다른 장관들은 공산주의자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한다면 자신도 공산주의에 반대하므로 자기도 체포하라고 요구하면서 잇달아 사임했다. 1960년에 쿠바에서 공산주의 문제는 더는 말재주로 피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온 국민도 공산주의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고 있었다. 쿠바 혁명은 농민, 종교인, 학생, 노동자, 정치인, 사회단체, 중산계급 등 모든 계급, 모든 직업, 모든 정치 세력이 쿠바 사회의 발전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함께 힘을 합쳐 이루어 낸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공산주의자라는 한 묶음으로 볼 수 없고, 그래서 쿠바 혁명을 공산주의 혁명이라고도 볼 수도 없다. 공산주의자 개인이 혁명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공산주의 계열의 대중사회당은 끝까지 피델의 혁명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혁명의 과정에서 누구도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경제를 목표로 한다고 밝히지도 않았다. 공개적으로 반공주의를 표방한 단체나 개인도 많았고 공산주의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것이 그들이 목숨 걸고 이룬 혁명을 보위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냉전의 한 복판에서 이루어졌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혁명의 이념인 것처럼 두드러지면 미국은 그것을 빌미 삼아 혁명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곧 혁명 정부를 취약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또 사회를 개혁하는데 실패하게 할 수도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 몇 해 전 과테말라는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농지개혁을 했고 토지를 빼앗긴 미국이 정부를 공산주의 정권으로 몰더니 군부 쿠데타를 지원해 정부를 전복하고 농지개혁을 무효로 했다. 쿠바가 과테말라처럼 되지 않는다는 법이 없었다. CIA가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사회 개혁을 반대하는 보수세력은 언제든 반공주의를 꺼내 들었다. 쿠바섬은 시골 마을에서까지도 혁명에서 공산주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토론에 빠져있었을 때 논란의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바나나기업 유나이티드 푸르트사에 동원된 과테말라 원주민들. 살인적인 노동과 저임금 착취에 시달렸고, 토지 개혁을 단행했지만 CIA에 의해 정권이 전복되었다. 

  1960년 소련 부총리 미코얀이 아바나에 도착했다. 소련은 과학 기술과 문화 같은 소프트 파워를 늘리기 위해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었고, 뉴욕에서 열리기도 했던 이 전시회를 쿠바가 아바나에 초청했다. 이때까지 쿠바 정부는 UN 같은 국제무대에서도 늘 미국의 입장을 따라 투표했고, 소련과는 아무런 외교관계도 없었다. 냉전의 긴장이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 미국의 호수에 미국의 적대국 소련 부총리가 방문한 것이다. 미코얀은 피델에 미국보다 앞선 소련의 과학과 7상 앞에서는 쿠바의 농지개혁을 추켜세웠다. 미코얀은 연설에서 쿠바 정부가 중단 없이 모든 생산 수단을 무상몰수 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쿠바를 떠나는 날 두 나라는 교역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는 향후 5년간 쿠바가 생산한 설탕의 20%를 소련이 구매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대금은 현금을 포함해 기계, 석유, 그리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파견해 지급한다고 했다. 미코얀이 대중 앞에서 양국의 무역 거래 협정에 대해 언급하자 쿠바인들은 총과 비행기도 보내라며 환호했다. 쿠바가 미국의 최대 적대국인 소련과 무역을 한다는 사실보다 쿠바가 독립된 공화국이 되었다는 더 확실한 증거가 있겠는가. 쿠바 국민은 소련을 미국을 견제해 쿠바의 주권을 바로 세워줄 지원 세력으로 보았다. 미코얀의 연설에 모든 쿠바인이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쿠바 예스, 러시아 노”, “민주주의 예스, 공산주의 노”라는 구호를 외쳤다. 미코얀의 방문과 교역 협정 뉴스에 쿠바 사람들보다 더 충격을 받은 곳은 워싱턴이었다. 백악관에서는 날마다 비밀회의가 열렸고 회의가 거듭될수록 전망은 어두웠다. 미국이 건국한 뒤로 이토록 미국에 앙심을 품어 적대적인 위협은 이제껏 없었다. 미국의 호수인 카리브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쿠바가 미국의 재산을 보상도 없이 몰수하더니 이제는 최대 적국인 소련을 미국의 턱밑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쿠바와 소련의 무역협정은 미국에 치명적이었다. 미국에 쿠바 혁명은 강력한 독극물 같은 것이었다. 과연 미국은 쿠바를 피델 이전의 쿠바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지, 다시 미국의 영향력이 통하는 쿠바로 다시 만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쿠바는 어제의 쿠바가 아니었다. 한 쿠바 신문은 사설에서 “미코얀의 방문은 혁명 정부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라고 했다. 미코얀 방문은 혁명과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논쟁은 또 다른 논쟁을 낳기 마련이다. 공산주의라는 주제가 대두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혁명 정부가 언론 자유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고 있었다.     

소련 부총리 미코얀의 쿠바 방문으로 미국은 쿠바를 적국으로 보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쿠바 언론들은 AP, UPI 같은 미국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 지면을 채워왔다. 혁명 뒤 미국 소유 자산을 몰수하자 통신사들은 쿠바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언론들은 공산주의를 비난하면서 쿠바 지도자들을 끼워 넣어 비난했고 동시에 친미적인 인사들을 중립적인 인물이라면서 쿠바와 미국 간 문제를 논평하게 했다. 언론의 논조는 자연스럽게 혁명 반대 입장으로 기울었다. 그때 쿠바에서는 언론에 기사가 나가면 기자와 편집자 명의로 ‘이 기사는 사주의 의사로 작성된 기사입니다. 쿠바는 언론의 자유가 있으므로 사주의 권리는 적법합니다. 그러나 기자와 편집자들은 이 기사에 담긴 내용이 진실이라고 동의하지 않으며 언론 윤리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기사라는 점을 우리의 적법한 권리로 밝힙니다’라는 꼬리 글을 달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꼬리 글들이 모든 매체 여러 기사에게 붙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1년 뒤 한 신문사가 미국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 인쇄하려 했을 때 기자들이 그런 내용의 꼬리 글을 붙여 편집하려 했다. 그러나 사주가 그것을 거부했다. 기자들이 경찰에 권리를 침해받은 점을 고발했고, 다음 날 아침 보수신문들은 꼬리 글 제도의 문제점을 공격하면서 사주의 입장을 옹호했다. 마이애미에 근거를 둔 사주는 결국 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결국 카스트로가 끼어들었고 앞으로 신문사는 신설된 국영 출판부에 통폐합될 것이라고 했다. 곧이어 1832년부터 발행되어 온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매체가 폐간되었다. 130여 년을 스페인 제국주의와 미국의 개입, 마차도와 바티스타의 독재정권을 옹호했고, 체 게바라의 혁명군이 아바나를 접수한 날에는 그들을 환영한다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던 매체였다. 며칠 뒤 또 다른 매체가 128년의 역사를 마친다는 부고 기사와 함께 스스로 문을 닫았다. 3개의 매체가 더 폐간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고 실제로 잇달아 신문들이 폐간되었다. 혁명에서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논쟁도 일었다. 1940년 헌법은 언론 자유를 보장했다. 혁명이 일어난 뒤 바티스타 폭력 정치를 옹호하고 미국의 개입을 지지했던 언론사주들은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강조하며 혁명을 비판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쿠바의 언론은 혁명과 반혁명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었다. 신문기자 노조는 혁명을 지키는 일이 곧 쿠바를 지키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런 논리면 혁명을 비판하는 일은 곧 쿠바를 비판하는 일이 된다. 어떤 언론이 혁명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을 표현할 수 있을까.

쿠바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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