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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34 봉쇄

봉쇄

  1960년 미국이 쿠바의 언론 통제에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그때 미국은 쿠바를 응징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피델은 여러 정황과 증거들을 대며 미국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때 미국 비행기는 쿠바 상공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은 언제든 비행기에 전단 대신 폭탄을 실어와 쏟아낼 수 있었다. 이런 위협이 쿠바 국민이 혁명 정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그러던 1960년에 76t의 수류탄과 탄약을 하역하던 프랑스 화물선이 폭발했다. 하역하던 쿠바인 75명이 죽었지만, 이 사건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바나에서 무기를 하역하던 <라 쿠브르>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했다. 쿠바는 쿠바의 무장을 원치 않는 미국의 소행으로 보았다.

 미국 관리들은 그런 위험한 화물을 다뤄본 적이 없었던 노동자들의 실수였다고 했고, 프랑스는 화물을 하역하는 과정에 폭발을 일으킬 만한 실수는 없었다고 했고, 뉴욕 타임스는 사보타주로 추정했다. 카스트로는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마련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들의 소행"이라며 미국을 비난했다. 쿠바인들은 쿠바에 대한 공격 행위로 받아들였고 단결을 외쳤다. 이 폭발은 심지어 미코얀의 방문을 공산주의에 문을 열어주는 행위라며 반대했던 세력들도 정부를 지지하도록 바꾸어 놓았다. 온 쿠바인들이 비통해했고, 피델 카스트로, 도르티코 대통령, 체 게바라가 폭발 희생자 추모 항의 행렬에서 맨 앞에 섰다. 피델이 30분 이상 한 연설에서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는 쿠바를 원하는 자들이 이 폭발의 가해자라며 그게 누구겠느냐고 군중들에게 물었다. 미국은 그  무렵 몇 달 동안 쿠바와 무기 거래를 협상하던 나라에 무기를 판매하지 말 것을 종용해 왔다. 피델은 1898년의 메인호 폭발 사건을 상기시켰다.

<라 쿠브르> 폭발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진을 이끄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미국은 그 사건을 스페인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빌미로 쿠바를 침략했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쿠바는 그때의 쿠바가 아니라며 미국에 경고했다. 지금 쿠바인들은 최후의 한 명까지 최후의 한 방울까지 피를 흘려 미국과 싸울 것이라고 했다. “…. 외세가 우리 해안에 접근하는 날 우리 노동자, 농민, 학생, 주부, 청소년, 노인,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우리 모든 쿠바인들은 두려움 없이, 망설임도 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기 참호를 지킬 것이다. 그들이 배로 오든, 낙하산을 타고 내리든, 비행기로 날아오든 얼마나 많은 적들이 쏟아져 들어오든….” 군중들은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함께 외쳤다. 

이날 쿠바의 한 사진작가가 지퍼 달린 재킷에 반짝이는 옷깃 위로 긴 머리카락을 흘러내린 한 남자의 사진을 찍었다. 별 하나가 빛나는 베레모를 쓰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진의 제목은 <게릴라 영웅Guerrillero Heroico>이었다. 쿠바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은 전 세계에서 티셔츠에 인쇄되었고 체 게바라는 혁명과 반란의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이 군중 집회 뒤 미 대사관은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같은 자들이 쿠바를 장악하고 있는 한 쿠바와 만족스러운 관계를 구축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그리고 실제로 쿠브르 호 폭파 사건이 있은 날부터 미국과 쿠바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쿠바에 과감한 경제 봉쇄를 실행한다는 국무부의 정책에 아이젠하워가 서명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준비한 시나리오가 진행될수록 계획과는 반대로 쿠바섬은 갈수록 소련 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국무성은 “미국의 모든 정책과 조치는 쿠바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반미주의자들을 극단주의자들로 만들도록 부추기는 것이다”라고 전략 목적을 설정했다. 

희생자 추모 대회에서 하늘을 응시하는 체 게바라. 이 사진은 저항과 혁명의 정신을 상징했다.

1960년 3월 17일 아이젠하워가 “카스트로 정권 전복 극비 계획”이라는 표지 제목이 붙은 프로젝트 보고서에 승인 서명했다. 이 문건은 “카스트로 정권을 미국이 용인할 수 있을 새로운 정권으로 교체하는 것”이라고 그 목표를 명백히 밝혔다. ‘극비 계획’은 크게 4단계로 구성되었다. 먼저 CIA가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를 쿠바 밖에서 양성한다. CIA는 이미 그런 활동을 할 여남은 단체를 조직해 관리하고 있다고도 했다. 두 번째로 쿠바 안에서 카스트로 정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카스트로의 지지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대중매체를 이용해 카스트로 정권을 공격하는 프로파간다를 공격적으로 실행한다. 프로파간다는 쿠바 외부에서 반카스트로 투쟁을 선언한 단체의 이름으로 실행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CIA는 쿠바까지 도달하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라디오 방송의 시간대를 모두 사 확보하고 동시에 온두라스와 쿠바 사이에 있는 ‘백조의 섬’에 군사 잠복 기지를 확보한다. 세 번째로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하는 ‘망명한’ 쿠바 사람들의 쿠바 진입 작전에 맞춰 쿠바 안에서 비밀 첩보와 소요 조직을 계속하고 마지막으로 CIA는 사전에 훈련된 ‘망명한’ 무장단원들을 신속하게 쿠바에 상륙시킨다. 이 모든 과정에서 미국의 ‘손’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이 작전계획서를 승인하면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아무것도 들은 바 없다고 서약할 준비를 하라”라고 말했다. 1960년 3월 아이젠하워는 쿠바섬으로 향하는 수출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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