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농지개혁
농지개혁
혁명 3개월 만에 미국 신문편집자 협회가 피델을 미국에 초대했다.
공식 방문이 아니었으므로 아이젠하워는 골프 약속을 지키러 떠났고 닉슨 부통령이 피델을 2시간 30분 동안 직접 대면했다. 미국이 피델을 가까이서 직접 확인할 충분한 기회였다. 닉슨은 “피델은 여러 면이 섞여 있는 지도자다. 그가 쿠바와 라틴아메리카의 앞날에 매우 큰 영향을 줄 변수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때 미 국무부가 작성한 문서에도 피델이 공산주의자라고 평가한 대목은 없었다. 다만 ‘피델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라고 평가했었다. 닉슨이 본 피델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피델은 닉슨에게 ‘쿠바 사람들은 무척 민족주의적’이며 미국이 쿠바를 경제적으로 협력했을 때 쿠바가 다시 미국의 ‘식민지colony’가 될 것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이런 대화로 보았을 때 닉슨은 피델을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로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혁명 정부의 초기 입법에서 공산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법안은 없었다. 농지개혁의 예를 들자면 농지개혁은 20세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개혁 대상이었다. 오히려 개인의 농지 소유 한도를 4㎢로 제한한 쿠바 혁명 정부의 농지개혁은 당시 세계적 추세에 비하면 온건한 정도였다. 일정 규모 이상의 대규모 농지 소유자의 토지를 회수해 재분배하는 것은 1940년 쿠바 헌법에서 이미 보장했을 뿐 아니라 유엔과 같은 세계 기구도 농지개혁을 권고하고 있었는데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수준에서 이루어졌고, 쿠바의 농지개혁은 소련의 콜호스 또는 솝호스 같은 공동생산 공동배분 방식의 집단 국영농장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온건했어도 토지개혁은 대중에게는 열렬히 지지받았지만 적을 만들어 냈다. 땅을 빼앗길 대토지 소유자 대다수가 토지개혁의 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적은 미국이었다. 땅을 빼앗길 대토지 소유자들 대다수가 미국인과 미국 기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미국의 정책입안자들과 경제 전문가들도 온건한 정도의 토지개혁은 인구 증가와 도시화를 촉진하므로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꼭 필요한 정책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쿠바 혁명 정부에 농지개혁을 반대한다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미국은 토지주에게 토지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고, 그것도 세금 기준이 아닌 실거래가 기준으로, 20년짜리 장기 국채가 아니라 현금 달러로, 20년 상환이 아니라 6개월 이내 상환을 조건으로 걸었다. 쿠바 혁명 정부가 4일 만에 답장했다. 이율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일본에 제시한 이율보다 더 높은 이율을 제시했다. 쿠바는 바티스타가 다 국고를 빼돌렸으므로 현금이 없었다. 더욱이 토지개혁은 시급성을 다투는 문제였으므로 다시 국가가 달러를 금고에 채울 때까지 기다릴만한 시간도 없었다. 조건은 아직 타결되지 않았지만, 첫 번째 몰수 조치는 시행되었다. 당시 미국 최대 토지 소유 기업이 소유한 땅 4만 에이커도 포함되어 있었다. 토지 소유주는 즉시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보내 쿠바의 미국 내 모든 자산을 몰수할 것과 쿠바에 해군을 파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미국 대통령은 1898년에 우리 미국이 쿠바를 스페인의 폭정으로부터 해방해 준 사실과 미국은 자유를 파괴하는 공산주의를 영원히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쿠바 사람들에게 분명히 깨우쳐 줘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61년은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었지만, 미국은 그때 미국이 쿠바에 했던 일을 반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들은 피델이 지금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면서 수시로 미국 대통령을 충동했다. 심지어는 미서전쟁 때 일곱 살짜리 어린애였던 아이젠하워마저도 “우리가 저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들이 곤궁해 일자리를 주었다”라며 미국이 쿠바에 질서를 잡아주고, 경제를 꾸려주었고, 기술과 돈을 들여보내 주었더니 오늘날 미국인과 미국 기업들에 배은망덕한 짓을 한다며 쿠바를 비난했다. 60년 동안 미국이 쿠바에 한 일이 그렇게 은혜로운 일이었을까? 지금 쿠바가 한 농지개혁이 그렇게 배은망덕한 짓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을까? 미서전쟁 이후 60년.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쿠바에 오직 호의와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극명하게 다른 관점은 어떤 통역으로도 소통될 수 없을 적대감의 뿌리였다. 토지를 몰수당한 미국은 이제 쿠바가 하는 모든 조치를 분명한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간주했다. 둘은 충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농지개혁 전까지 쿠바 혁명을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본 뉴욕 타임스와 타임스지 기사는 1건씩이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을 시행한 뒤 그런 기사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쏟아졌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은 미국 전체 가구의 70%가 수상기를 보유할 만큼 대중화되었다. 미국 국민 대다수가 저녁 주 시청 시간대에 텔레비전 뉴스를 보았다. 텔레비전은 미국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서 개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회적 기구가 되었다. 방송사들은 TV 시청률을 경쟁을 위해 폭력과 갈등, 선정성으로도 경쟁했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광고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TV 뉴스들도 가세해 쿠바 혁명 정부를 공산주의자들로 몰아갔고 증오를 끌어올려 갔다. 1960년을 보여 주는 미국의 풍경이었다.
농지개혁은 쿠바의 내각도 갈랐다. 혁명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고 있다며 일부 장관들이 사임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에서 제 손으로 농지개혁법 초안을 작성했던 농업부 장관마저도 위원회에 공산주의자가 포함되어 있다며 사임했다. 중립적이거나 반공주의를 주장한 다른 장관들도 사임하거나 피델에 의해 해임되었다. 중립적이었던 우루티아 대통령도 혁명에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늘고 있다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방송에 나와서 피델에게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직접 말해보라고 빈정대듯 했다. 피델이 텔레비전에 나와 대통령과 의견 차이가 있으므로 사임한다고 선언했다. 혁명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인지 아닌지가 쿠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집중하게 했다. 피델에 대면 우루티아의 인기는 견줄 정도가 못되었다. 대중들이 대통령 궁 앞에 모여 피델이 아니라 우루티아가 사임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도 사임했다. 쿠바는 대통령도 총리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노조는 파업을 경고했고 내각은 피델의 사임을 수용하지 않았다. “피델 없는 혁명은 반역이다.” “우리는 피델과 함께 간다.” 같은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7.26운동 거사 기념일에 신임 대통령이 피델이 국민의 요구에 따라 수상직에 복귀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