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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31 혁명

혁명

  1959년 새로운 해가 카리브 하늘로 밝았다. 아침 10시부터 쿠바의 모든 미디어들이 바티스타가 도망쳤다는 뉴스를 방송했다. 시민들이 말레콘에 쏟아져 나왔다.  음악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춤을 추었다. 자동차들은 말레콘을 따라 길게 줄지어 행진하며 경적을 울려댔다. 아바나의 수호성인이 있다는 아바나 대성당의 종도 요란하게 흔들렸다. 아직 체 게바라 부대가 아바나에 입성하지 않았지만, 아바나의 7.26운동 대원들이 정부 주요 건물을 장악했다. 혁명군의 발표를 직접 듣고 싶어 하는 시민들이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췄다. 피델이 직접 라디오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망쳤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어둑해졌을 때 피델 일행이 산티아고 데 쿠바의 세스페데스 광장에 들어섰다. 수염 덥수룩한 게릴라들이 환호하는 사람들에 이리저리 떠밀렸다. 

쿠바 혁명군의 진격로. 체 게바라 부대가 선봉이었다./BBC

피델은 세스페데스 광장의 시청 청사 2층 베란다에 나와 승리의 연설을 했다.  “우리가 여기 왔습니다”라는 첫 문장에 수만 군중의 환호가 우레 같았다. 승리를 확인해 주는 우레였다. 그는 손에 종이 한 장 들지 않은 채 12.000여 단어에 30페이지 분량으로 연설했다. 피델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도둑놈도 반역자도 외세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순간 진정한 혁명이 시작됩니다Esta vez sí que es la Revoluión.”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제부터 쿠바의 수도는 산티아고”라고 선언했다. 아바나까지 바티스타 군대를 무장 해제하며 진군해 온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다음날 아바나에 도착해 군사 시설을 접수했다. 젊은이들은 7.26운동을 상징하는 완장을 차고 붉은 셔츠를 입어 혁명을 지지했다. 또 수염을 길러 산에서 내려온 혁명군을 흉내 냈고, 마이애미로 도피했던 정치범들이 속속 귀국했다. 백화점도 부유한 저택도 보험회사도 심지어 은행도 혁명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퇴역 군인들은 체 게바라와 함께 대로를 행진하며 혁명을 지지했다. 쿠바 국민 92%가 혁명 정부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는 여론조사도 있었다. 심지어 아이젠하워 미국 행정부까지도 7일 만에 혁명 정부를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피델은 한번 연설을 시작하면 몇 시간씩 원고도 없이 길게 연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부터 쿠바의 수도는 산티아고”라는 갑작스러운 선언은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그의 긴 연설 방식에서 튀어나온 실수였고, 앞으로 기나긴 혁명 과정에서 일어날 많은 혼란의 한 예일뿐이었다.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그의 혁명은 잘 준비되지 않은 채 급진적이며 과격하게 추진되었다.

  1월 8일 “고마워요, 피델”이라 쓴 피켓을 든 아바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버스 유리창에도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도 그런 문구가 내걸렸다. 군중들 사이로 탱크가 느리고 들어오고 있었고, 탱크 오른쪽에는 피델이 올라서 손을 흔들어 군중들의 환호에 호응했다. 피델의 탱크는 대통령 궁에 섰다. 마중 나온 우루티아 대통령 지명자가 피델과 함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은 열광했다. 새로운 내각은 정치 경험이 풍부한 친기업적 자유주의적 인물로 구성되었다. 피델은 군 사령관직 하나만 맡았다. 미국이 소유한 아바나 힐튼 호텔이 그의 집무실이었다. 국민은 미국이 갑자기 끼어들어 낚아채 가 독립이 지체된 세월이 50년이나 되었으니 독립 국가 건설을 서두르라 재촉했다. 피델의 혁명 정부는 몇 달이 걸릴 개혁을 하룻밤 새 끝내고 10여 년 걸릴 과제를 1년에 끝내려는 듯이 서둘렀다. 날마다 정부의 중대 발표가 이어졌다. 한 달 전의 정책을 갈아엎고 어제 만든 법을 오늘 다시 바꿨다. 첫 아홉 달 동안 혁명 정부가 통과시킨 법이 1,500여 가지나 되었다. 임금을 인상하고, 전화 전기 요금을 인하하고, 주택 임차료를 낮추고, 농지를 포함해 전임 정부에 복무한 공무원들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배분했다. 민중들이 오랜 세월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정책들이었다. 혁명은 진행되고 있었다.      

  혁명 정부는 의회와 정치 세력들을 해산하고 선출직 공무원들을 해고했다. 기존 군대도 해산하고 바티스타의 비밀경찰 조직도, 국민에게 고문을 가한 정보기관도 해체했다. 과거의 모든 장치들을 거침없이 뽑아냈다. 2주가 채 되기 전에 새 내각은 재판 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두 개의 중요 법률을 통과시켰다. 바티스타 폭압 정치에 부역했던 자들을 재판할 때 대중들은 복수를 요구했고, 독재에 희생되었던 자들을 집단 암매장한 곳들이 발견될 때마다 가해자들에 대해 처벌을 요구했다. 그들에 대한 처벌에 만족하지 않으면 파업과 시위를 진행했다. 무질서한 사적 보복을 우려한 정부는 혁명재판을 운영해 바티스타 정권에 부역했던 주요 공무원들을 재판했다. 혁명군대원과 지역민으로 구성된 혁명재판부는 군중 앞에서 증언을 청취해 판단했다. 재판에 세워진 자들에 대해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증언하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고발했다. 군인은 상사의 범죄행위를 고발했고, 재판정에 세워진 자들은 대체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상부의 지시를 받고 했을 뿐이라고 방어했다. 어느 날 아침 산티아고에서는 바티스타가 운영한 친위군사 조직원 71명이 총살당했다. 공개 처형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기자들이 몰려왔고 아바나와 뉴욕 신문들이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몸이 반으로 접힌 시신 사진을 게재했고, 또 어느 신문은 옆 처형대를 향해 내려진 사격 명령을 듣는 죄수의 표정이 찍힌 사진을 실었다. 긴 구덩이에 가득 찬 시신 더미를 찍은 사진도 게재되었다. 1월 1달 동안 250명 이상이 인민재판만으로 처형당했다. 3월까지는 500명이 넘게 처형되었는데 대개는 전직 군인, 경찰, 고문과 학살 행위에 가담한 정보기관 요원이었다. 혁명의 재판은 8세기 전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나아가지 못했다.      

체 게바라는 인민재판으로 공개 처형했다.

  인민재판과 즉결 처형 기사는 목소리를 높이려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쓰임새가 많았다. 혁명 정부를 비난하는 칼럼들이 미국 매체를 채웠다. 쿠바를 대상으로 한 황색 저널리즘이 다시 시작했다. 이런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동영상 필름에서 컷을 따 실었다. 그러나 쿠바 민중들은 이런 재판을 강하게 지지했다. 바티스타 세력에게 당했던 고통과 억울함을 생각하면 민중들은 더 많은 대상을 더 빠르게 처단하기를 바랐고, 그렇게 처단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압도했다. 한 여론조사는 쿠바 국민 90%가 이런 인민재판 방식을 지지한다고 보여주었다. 쿠바의 교수사회와 학생들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은 바티스타 정권에서 악질적인 행위를 일삼았던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막기 위해 혁명 정부는 이런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서신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냈다. 심지어 친미 성향의 사제단까지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인민재판을 지지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혁명 정부는 재판을 요구하는 쿠바 국민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세계에 입증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 라틴아메리카 국가, 영국에 재판 참관인을 초대했다. 그들에게 이 재판이 쿠바 국민의 절대적인 요구를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하게 했다. 10만 명 이상 군중들이 모인 광장에는 “정의로워야 혁명이다”, “제국주의자 앞잡이를 처단하라”, “쿠바 여성들은 살인자들을 처형할 것을 요구한다.” 같은 플래카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20만여 명을 사상한 것은 미국 아니었나 물었고, 뉘른베르크 재판은 전범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는 있지도 않았던 법률을 새로 만들어 소급 재판해 처형했으면서 쿠바에서는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자들을 재판으로 처벌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냐고 물었다. 바티스타가 그 많은 쿠바인을 학살했을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미국의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지금은 왜 이토록 쿠바를 비난하는 것인지 쿠바인들이 분노했다. 광장의 대중들은 지금 미국이 쿠바를 비난하는 것은 쿠바의 혁명을 부정하려고 입을 맞춘 교활한 미국인들의 합창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피델은 ‘여러분께 묻습니다. 지금 행해지고 있는 재판이 정의롭다고 여기신다면, 바티스타의 충복으로 국민을 학살하고 고문했던 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손을 들어 올리세요’라고 요청했고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손을 들었다. 두 손을 든 군중도 많았다. 피델은 300여 명의 초대자를 향해 “세계 각국에서 오신 외교관들과 기자들은 저 수십만 배심원들의 일치된 판결을 똑똑히 보시오. 이것이 민주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우루티아는 취임하자마자 국가의 부패를 조장해 온 매춘업소, 도박장, 경마장을 폐쇄했다. 이것들은 쿠바에서 인력을 가장 많이 고용한 산업들이었다. 일자리를 잃게 된 이들이 저항했고 피델이 개입해 대체 직업을 찾을 때까지 폐쇄를 유예하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곳곳에서 의견 불일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카스트로의 스타일을 좋아했지만, 관료들은 생각이 달랐다. 1달 만에 총리가 사임했고 피델이 총리직에 올랐다. 총리에게 이전보다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었다. 총리의 권한이 강해졌으니, 대통령의 권한은 위축되었다. 우루티아는 바티스타가 받던 연봉 수준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이어받아 10만 달러나 되는 연봉을 받아 비판받았다. 피델의 존재가 정치의 질서를 결정했다. 3월에 임차료를 50%를 낮춘다는 도시개혁법이 통과되었다. 당시 쿠바인 63%가 주택을 임차해 살고 있었는데 건물주는 하루아침에 임대료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임금을 인상하고 공공요금을 내리고 인종 차별을 근절할 조치들도 시행했다. 몇 달 만에 쿠바 민중들은 혁명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욕구가 부풀어 올랐다. 흑인 활동가들은 더 적극적인 인종 차별 억제 정책을 요구했고, 여자들은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낮에 어린아이들을 돌봐줄 서비스를 요구하고 채소가게나 카페의 영업시간을 연장해 달라고도 요구했다. 농민들은 수십 년 전부터 국가가 약속했던 토지 무상 배분도 요구했다. 노동조합도 정부를 압박했다.     


  혁명 쿠바는 움직이고 있었다. CIA는 그런 쿠바가 미국의 이익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분석했다. 피델의 주위에 누가 있는지, 피델이 일 분에 300 단어 가까이 쏟아내며 웅변한다는 것까지도 분석했다. 그렇게 분석했지만, 피델에 대한 시각은 아직 분명해지지 않았다. 피델이 공산주의자라는 자도 있었고,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CIA 국장이 그런 입장이었다. 그는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강력한 반공주의자다”라고 단언했다. 피델의 연설 분석전문가는 피델은 반미주의자도 아니라고 했다. 어느 정치가는 ‘마치 악마가 성수를 싫어하듯 피델은 미국을 싫어한다’라고 했다. 이런 혼란은 피델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시그널이나 발언은 일관되지 않고 즉흥적이어서 가끔은 말에 모순이 있었다. 그 모순은 미국이 피델의 암호를 풀어내기 어렵게 했고 미국이 피델과 쿠바의 앞날을 예상하기 어렵게 했다. 선거를 1년 뒤에 실시한다고 했다가도 지금 선거를 하면 바티스타 체제의 잔재를 제거하는 일이 지체될 것이니 연기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혁명이 먼저다. 선거는 나중에’라는 모토를 개발했다. 선거가 가장 뒷순위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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