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카운트다운
전야
1957년 3월 바티스타를 암살하려는 아바나대학생 조직이 행동에 옮겼다. 한 조는 대통령 궁에 잠입해 바티스타를 살해하고 두 번째 조는 궁 전체를 장악해 첫 번째 조를 엄호하고 세 번째 조는 아바나 최대 뉴스 방송국을 점거해 바티스타가 죽었으니 온 국민이 봉기해 정부군과 싸우자고 촉구하는 선언문을 읽을 것이었다. 대통령 궁 진입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2층에 있어야 할 바티스타가 마침 그들이 난입했을 때 3층에 있었다. 3층 공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학생들은 바티스타를 찾아 사살할 수 없었다.
바티스타 제거에 실패한 학생들이 철수할 때 벌써 군인들이 대통령 궁에 도착했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바티스타가 사살되었다는 선언문을 낭독한 학생운동 지도자는 작전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방송국 문을 나섰고 그를 발견한 경찰이 총 3발을 쏘았다. 함께 있던 학생들은 흩어졌다. 총에 맞아 피를 내뿜는 학생 지도자를 공수부대원이 허리띠를 잡아 아스팔트 바닥을 질질 끌고 갔다. 열대의 뜨거운 태양을 바라고 죽어가는 25살 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총에 맞은 지 1시간 30분 동안 거리에 방치되었다가 죽었다. 한 달 동안 경찰은 도피한 학생들을 찾아내 학살했다. 피델이 산에서 세력을 키우는 동안 아바나에서 반바티스타 투쟁을 지휘해 온 학생 지도부 조직이 괴멸되었다. 이제는 마에스트라 산을 근거로 무력 투쟁을 전개하는 피델과 게릴라들이 반바티스타 투쟁의 가장 강력한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피델과 7.26 운동본부가 세력을 넓힐수록 바티스타의 땅은 좁아졌다. 주요 도시의 7.26 운동 세력이 총파업을 조직했다. 1933년 마차도를 축출했을 때 결정타를 입혔을 만큼 강력한 투쟁 방법이었던 전국 총파업이 24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이루어졌다. 체 게바라가 이 총파업이 겨우 버티고 있는 바티스타 정권을 쓰러트리는 결정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바티스타는 이 파업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7.26 운동본부는 국가를 재건할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을 산으로 초빙해 피델과 회의했다. 산에서 내려가면 군사정권이 아닌 1년 동안 임시 정부가 국가를 통치하고 민주적 선거를 치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또 정치범을 석방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1940년 헌법에서 정한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완전히 인정하고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공교육을 확대하고, 농지개혁을 시행하기로 하는 등 주요 정책도 정했다. 또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이나 간섭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선언하고, 미국은 더는 바티스타 군부에 무기를 대주지 말 것도 경고했다. 난공불락의 성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은 쿠바의 자유를 상징했다. 회의를 마친 피델은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나 원로 야당 인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세계 사람들은 활달하게 웃는 젊고 건강한 피델의 표정에서 돈키호테처럼 도전적이면서도 소박한 인간미를 느꼈고, 게릴라가 아닌 성숙한 정치인의 향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잘생긴 용모에 수염 덥수룩한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사진들은 혁명을 낭만적으로 느끼게 했다. 몇 차례의 언론 인터뷰로 세상에 드러낸 피델과 게릴라들의 사진이 세계인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쿠바에서 치솟은 그들의 인기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었다. 산 아래 산티아고에서 피델을 지원했던 학생운동 지도자가 경찰에 사살된 사건이 있었고 그의 장례식에 시민 절반 가까이가 참석해 대열을 이루어 함께 걸었다. 대열은 “바티스타를 죽이자”라는 구호를 함께 외쳤다. 운구차가 지나는 곳마다 시민들은 발코니에서는 꽃을 뿌렸다. 장례식이라기보다는 바티스타를 저주하려는 행렬에 가까웠다. 총으로 무장한 정치깡패와 경찰, 군인들은 이들을 잔인하게 상대했다. TV에서는 폭탄 폭발, 암살과 저격 사건, 그리고 유혈 폭력 사태 같은 장면들이 가장 자주 나왔다. 이런 사건 관련한 기사들끼리 아침 신문의 머리기사 자리를 다투었다. 그런 기사 아래는 새롭게 열리는 요트 대회 개최 소식, 지역마다 열리는 축제 소식과 골프 챔피언십 대회, 세계적인 명차들이 참가하는 카 레이스 관련 기사가 채웠다. 때로는 새로 단장해 갓 개업한 카바레 관련 기사와 광고도 지면을 차지했다. 1957년 한 미국 조사 기관은 산티아고 시민 95%가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보고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미국 대사는 이런 자료를 첨부해 바티스타가 질서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바티스타의 잔혹한 대응이 오히려 바티스타 반대 세력을 키우고 있다고도 했다.
1958년 봄에 400여 명이었던 혁명군은 그해 여름에 3,000여 명이 되었다. 산티아고의 젊은이들이 산으로 올라왔고 혁명군이 진군하는 곳마다 민중들이 혁명군 군복을 입었다. 군사가 많아진 게릴라들은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전선을 확대했다. 아바나 진격에 선봉을 체 게바라가, 본대는 피델이, 후방의 관타나모 일대는 라울 카스트로가 맡았다. 혁명군이 접수한 지역에서는 혁명군이 만든 세금과 교육 제도, 법령이 적용되었다. 바티스타가 통치하는 쿠바와 혁명군이 통치하는 쿠바는 서로 다른 쿠바였다. 폭동을 우려한 바티스타가 아바나대학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를 폐쇄했다. 그렇더라도 그가 집권하는 한은 질서가 유지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 밤은 아바나에서 100곳이 넘는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매일 테러가 발생했고 경찰들은 매일 사람을 사살했다. 미국 대사관의 보고서는 폭탄, 폭발, 테러, 방화, 살해, 구타, 고문 같은 단어로 채워졌다. 미국의 설탕 산업 자본가들도 바티스타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다. 지금까지 바티스타와 연합해 온 쿠바 공산당도 지지를 철회하고 피델의 7.26 운동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슬슬 태도를 바꾸었다. 미국은 바티스타에게 더는 무기를 대주지 않았고 바티스타는 최루탄마저도 바닥났다. 1958년 크리스마스이브. 바티스타는 아바나 항에 세워진 대형 예수상을 바라보며 부디 예수가 미국보다 강한 힘을 발휘해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선 그가 군부에 혁명군을 진압할 최후의 작전을 명령했다. 작전명은 ‘피델의 마지막 날Fin de Fidel’. 그러나 예수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못했고 그날이 피델의 마지막 날이 되지도 않았다.
혁명군은 CIA와 타협하지도 않았고 체 게바라는 전투에서 패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바티스타의 숨통을 끊어놓은 결정적인 승리마저 거두었다. 1958년 12월 31일 바티스타와 고위 관료, 미국의 정치인과 기업가들, 그리고 마피아 거두 돈 마이클 콜레오네는 턱시도를 입고 신년맞이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새해를 맞는 카운트다운을 끝내고 서로 축하 말을 나누고 있었지만, 정부군의 아바나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새해 축하 인사를 다 나누기도 전에 파티는 끝났다. 모두 부랴부랴 쿠바를 도망쳤다. CIA의 계획의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바티스타에게 마지막 비행기를 제안한 것은 CIA였다. 마차도가 그랬듯이 바티스타도 그날 밤 급히 여권을 챙겨 CIA가 제공한 비행기를 얻어 타고 턱시도를 입고 쿠바를 떠났다. 그도 쿠바를 떠나는 비행기에 달러와 금을 가득 실었다. 그나마 뒤꽁무니에 총알이 쏟아지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새해를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맞았다. 그리고는 다시 쿠바에 돌아오지 못했다. 영화 <대부 2>에서 턱시도 차림의 마이클 콜레오네도 그날 밤 가까스로 아바나를 떠났다. 그도 다시는 쿠바에 돌아오지 못했다. 7.26 운동본부가 아바나를 접수했다. CIA는 바티스타를 내보내 총격전 없이 혁명군이 아바나를 접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CIA의 명민한 작전이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혁명군은 공동 임시정부군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온전히 승리한 혁명군으로서 아바나에 입성했다. CIA의 실패한 절반의 작전이 그것이었다. 미국이 비호한 바티스타 독재라는 육중한 투우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스페인을 상대로 한 400년 투쟁이 열매를 맺을 때 들어온 미국을 상대로 한 50여 년까지.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투우를 상대로 한 긴 겨룸의 세월이었다. 체 게바라의 혁명군은 500년간 민중의 피를 흘리게 한 식민 제국주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쿠 드 그라스Coup de grâce를 위해 아바나에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