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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41 벼랑

벼랑

  10월 27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날이었다." 미 해군 구축함 11척과 항공모함 랜돌프 호는 쿠바 봉쇄 작전의 하나로 소련 잠수함을 추격해 수면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분쟁을 키우지 않기 위해 미 해군은 폭뢰를 발사했다. 폭뢰는 파괴적인 수압 충격으로 잠수함 장치를 고장 내도록 고안된 대잠수함 폭탄이다. 장비가 고장 난 잠수함은 산소가 부족하면 물 위로 올라와야 했다. 미 해군은 지금 목표로 삼은 B-59 잠수함이 핵 어뢰를 탑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반대로 모스크바와 교신이 끊긴 B-59 잠수함은 쿠바 봉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해 후텁지근한 통제실 안에서 B-59 선장은 미 해군의 공격을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로 여겼다. 그가 핵 어뢰를 발사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발사는 3명의 장교가 동의해야 가능했다. 그중 한 명인 장교 바실리 아르히포프Vasily Arkhipov가 발사를 거부했고 핵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가 '검은 토요일'에 세상을 구했다.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세상을 구했다.

  혼잣말했던 흐루쇼프가 협상을 제안했다. 미국과 소련의 비밀 통신선이 대서양을 바쁘게 연결했다. 11시간 동안 두 지도자는 수많은 비밀회의와 극적인 전보를 주고받았다. 미국이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튀르키예에서 미사일을 제거하고 또 소련이 철수한 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소련은 쿠바에서 모든 미사일과 소련군을 철수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케네디는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제거하기로 했다. 소련의 쿠바 미사일 제거는 유엔 감시하에 하기로 했다. 둘은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선 뒤에서야 비로소 발아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물러섰다. 벼랑에서 내려갈 사닥다리를 찾는데도 3일이 더 걸렸다. 1962년 10월 말과 11월 초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둘러싼 1962년 10월 16일부터 29일까지  13일간의 대결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라고 하고 구소련 또는 러시아에서는 ‘카리브해 위기’라고 부른다. 미소 대결의 한 복판에 있었던 쿠바는 ‘10월 위기’라고 부른다. 쿠바에서 ‘10월 위기’는 험난한 위기의 연속이었던 혁명의 초기를 상징한다.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벼랑 끝에서 내려온 사닥다리 한 칸에는 비밀 거래가 들어있었다. 소련은 공개적으로 쿠바의 미사일을 제거하지만 미국은 튀르키예에서 미사일을 제거하는 것을 비밀리에 하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흐루쇼프가 케네디에게 주는 합의금 같은 것이었다. 이 합의금 조항은 케네디가 죽은 지 24년이나 지나서 공개되었다. 러시아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쿠바를 방어하는 것이 러시아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핵 열세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 그들이 원했던 이익이었다. 그때 미국은 소련보다 약 7배 많은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고 미국이 모스크바까지 2,000km 떨어진 튀르키예에 배치한 중거리 탄도미사일은 러시아에 대한 정면 위협이었다. 반면 소련은 미국 본토에 핵을 도달시킬 능력이 없었다. 러시아가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면 그 점을 바꿀 수 있었고 현상 유지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협상이 11시간 만에 타결된 데는 케네디의 빠른 결단 때문이었다. 10월 미사일 위기로 흐루쇼프와 협상하기 훨씬 전에 케네디는 튀르키예에 설치된 주피터 미사일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튀르키예에 배치한 핵미사일이 미국 안보에 실질적인 전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철수하기로 마음먹은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사일을 쿠바에 설치된 러시아의 핵미사일과 바꾸는 것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케네디가 쿠바에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합의 사항으로 튀르키예에서 미사일을 제거한 것이 밝혀지면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소련에 물러나는 것으로 비칠 것이었다. 케네디는 이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케네디는 협상에서 이 내용만큼은 비밀로 유지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러시아는 그렇게 하기로 동의해 주었다. 이 합의를 한 두 당사자 중 한 명은 다음 해 암살되었다. 또 한 명은 케네디가 암살된 지 1년 후 권력에서 축출당했다. 이 합의금이 흐루쇼프의 정치 생명을 끊었다. 러시아는 공개적으로 쿠바에서 미사일을 제거했지만 미국이 튀르키예에서 한 일을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협상으로 알려진 것은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흐루쇼프가 러시아를 미국에 무릎을 꿇은 것이 되었고 러시아 사람들은 그런 흐루쇼프를 용서하지 않았다. 

    

쿠바에 설치된 핵미사일 관련한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쿠바는 초대받지 못했다.

  피델이 "개자식, 후래 새끼, 시궁창 만도 못한 놈"이라고 소리쳤다. 전쟁 지휘부 벙커로 삼은 나시오날 호텔에서 피델은 흐루쇼프가 쿠바 안에 있는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모스크바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들었다. 세계는 큰 숨을 내쉬었지만, 라디오를 듣기 전에 케네디든 흐루쇼프 등 쿠바의 안위 문제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의견을 질문받은 적도, 사전에 통보를 받은 적도 없었던 피델은 분노했다. 흐루쇼프의 협상 조건이라는 미국의 쿠바 불침 약속은 단지 그들끼리의 구두 합의였을 뿐이었다. 문서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고, 쿠바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라디오 방송에서 쿠바와 관련해 한 말이라고는 ‘쿠바는 외세의 간섭 없이 살아갈 권리가 있다’라는 정도의 언급뿐이었다. 이번에도 쿠바의 운명을 결정짓는 미사일 철수 협상 자리에 쿠바의 의자는 처음부터 없었다. 1898년 쿠바가 독립 전쟁을 끝냈을 때 미국이 나타나 스페인과 종전 협상을 하면서 쿠바 독립군과 임시 정부를 회의에 배제한 것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피델은 완전히 모욕적이며 이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피델이 ‘동맹국’이라는 소련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피델은 유엔에 공문을 보내 케네디가 쿠바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이행하겠다면 미국의 쿠바 봉쇄를 즉시 해제하고 관타나모의 미 해군기지를 폐쇄하여야 한다고 했다. 물론 케네디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케네디에 한 약속에는 유엔 사찰하에 쿠바 미사일을 철거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유엔이 사찰하려면 쿠바 정부가 허락해야 한다. 문제는 과연 피델이 이를 받아줄 것인가에 있었다. 흐루쇼프가 피델에 편지를 써 ‘펜타곤의 매파들이 당신을 자극해 이 협상을 파기하려 하니 부디 자제하고 또 자제하기를 권고한다’라고 했다. 피델이 답장했다. ‘우리 정부는 오늘 유엔에 보낸 공문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나도 분명히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우리는 우리 영토에서 누구도 어떠한 조사inspection도 허락하지 않는다.’ 피델의 편지는 차가웠다. 13일간의 위기는 끝났다고들 말하지만 피델이 쿠바 영토에 대한 사찰을 허락하지 않는 마당에 그 끝났다는 위기가 과연 끝이 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위기는 11월로 넘어갔다. 사찰은 협상의 조건이라며 미국은 하루에 30대의 정찰기를 쿠바 상공에 띄워 미사일 기지를 촬영했다. 쿠바는 미국이 쿠바 영공을 침략할 것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뒤 요격하겠다고 경고했다. 피델이 사찰에 응할 가능성이 절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다시 협상했다. 소련은 쿠바에서 핵미사일뿐 아니라 경전투기도 철수하기로 하고 미국은 사찰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돌아갈 배에 대한 봉쇄를 해제하기로 했다.      

쿠바의 10월 미사일 위기를 풍자한 만화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소 양국에는 ‘핫라인’을 처음 연결했고, 핵 개발 경쟁의 속도를 완만하게 하고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게 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케네디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케네디는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쿠바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 해군은 해상봉쇄를 강화할 것’이라고 기자회견에서 밝혔고 미국인들은 환호했다. 날마다 쿠바를 집어삼키려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머리에 이고 사는 피델과 쿠바인들은 다시 맨 몸뚱이 다윗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만일 10월 위기의 정점에서 사다리를 내려올 때 그 사다리가 쿠바도 협상에 참여해 만든 사다리였다면 10월 위기는 쿠바와 미국 간 대립을 끝낼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도 흐루쇼프도 그날 밤도 11월에도 피델에 전화를 걸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피델과 의논하지 않았으므로 쿠바와 소련의 관계도 금이 가기는 했지만 관계는 지속되었다. 소련은 핵을 뺀 무장을 제공해 쿠바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국민 1인당 무장을 많이 한 나라로 변모시켰다. CIA는 피그만에 집중하는 동안 중단했던 쿠바 정부 요인 제거 공작을 재개했다. 독이 든 펜으로 독살한다든지 마피아를 동원해 자동차 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시가에 폭약을 감춰 터트리는 등 007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수법들을 쿠바에서 적용했다. 심지어는 연설을 앞둔 피델의 얼굴에 LSD 성분이 포함된 스프레이를 뿌려 정신이상자로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제모제 성분을 음식에 넣어 그의 수염과 머리칼을 빠지게 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카리스마가 거기서 뿜어져 나온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CIA는 이런 작전에 매년 500만 달러 이상을 써서 수백 가지의 은밀한 작전을 진행했다. 600여 회에 걸친 카스트로 암살 시도에서도 피델은 건재했고 피델의 카리스마는 그가 자연사할 때까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그날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도 쿠바와 미국은 적대적 관계로 묶여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난 지 두 달 뒤인 1962년 12월 23일에 쿠바에서 석방된 자들을 태운 첫 비행기가 마이애미에 착륙했다. 협상을 주도한 로버트 F. 케네디 법무부 장관은 제약회사와 유아식 제조업체에 기부를 간청해야 했다. 일주일 후인 12월 29일 토요일 케네디 대통령은 풀려난 쿠바 망명자들을 마이애미의 미식축구 결승 경기장에 초청해 기념식을 열었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여단 깃발을 케네디에게 전달했다. 케네디는 “나는 쿠바에 자유가 다시 찾아오는 날 2506 여단 깃발을 다시 휘날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케네디의 확신은 실현되지 않았다.   

   

  13개월 후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케네디가 암살된 지 1년 후 흐루쇼프도 축출되었다.

      

  미국과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경제는 패배의 징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의 경제봉쇄는 계속되었고, 벌써 중앙통제식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이 쿠바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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