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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40 핵

핵미사일

  1962년 5월. 모스크바가 쿠바에 핵무기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이 또다시 침공하리라는 것을 확신한 쿠바는 소련에서 무기를 사들이고 정규군을 확대하고 있었다. 소련의 핵무기가 미국에 대한 전쟁 억제력을 수천 배 더 강화할 것이므로 쿠바는 이를 받아들였다.      

핵미사일을 실은 배가 쿠바를 향해 항해하고 있다 

  1962년 7월 조용한 시골 마을인 산타크루즈 데 로스 피노스 마을. 아바나에서 왔다는 군인들이 소를 키우고 콩을 심으며 살아온 농부 가족에게 정부가 다른 마을에 새로 집을 지어줄 것이니 땅을 떠나라고 했다. 그해 10월 군에서 대위로 갓 전역한 페르난데스는 지금 자신이 무엇인가 이상하고 민감한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바나 외곽의 항구로 가서 화물선에서 하역될 일단의 차량을 자전거를 타고 어느 작은 마을까지 안내하라는 이상한 임무를 받았다. 목적지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이끌 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안내할 사람들은 쿠바의 새로운 동맹국인 소련에서 온 형제애로 뭉친 관개수로 설계 전문가 ‘동무compay’들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러시아에서 온 ‘동무’ 고문들이 농업 장비를 배에 싣고 와 쿠바에 농업을 지도해 줄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굳이 이 깊은 밤에 배에서 장비를 내려서 동이 트기 전까지 그 마을에 도착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 이상한 것은 그가 자전거로 지나는 곳마다 쿠바 군인들이 도로에 길게 줄을 서서 거대한 트럭이 지나가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러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정부가 지어준 새집으로 며칠 전에 이사한 농부는 짐을 실은 트럭 행렬이 지나갈 때 그 움직임에 땅이 으르렁대며 흔들림을 느꼈다. 농부는 물론이고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큰 장비를 여태 본 적이 없다고 수군댔다. 페르난데스는 자꾸만 무언가 불길하다고 느꼈다. 그가 자전거로 호송한 차들이 핵탄두 36개가 실린 냉장 트럭들이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농부가 집을 옮긴 집터에는 R-12 중거리 핵미사일 기지가 만들어졌다. 소가 풀을 뜯고 농부가 흙을 뒤집어 콩을 갈던 땅에 마이애미를 넘어 뉴욕과 워싱턴도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를 보관하는 사일로와 핵미사일 발사대가 들어섰다. 혹한의 겨울만 7개월이 넘는 모스크바에서 막 도착한 4만 명의 소련군 병사에게 카리브의 태양은 견디기 힘들도록 뜨거웠고 열대 우림의 빽빽한 숲이 뿜어내는 습한 공기는 젖어 무거운 담요를 뒤집어쓴 듯했다.     

쿠바에 설치된 소련의 핵미사일

 

  1962년 10월 16일 아침. 케네디는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미국 U-2 정찰기가 쿠바섬에 건설 중인 소련의 탄도 미사일 기지를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발사대, 격납고, 수직 거동 장치 같은 설명이 붙어있었다. 참모는 이 미사일이 발사되면 미국 본토가 핵 공격을 받는다고 보고했다. 전쟁 내각회의가 빠르게 소집되었다.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포함한 고문과 내각 관료들이 모였다. CIA는 봄부터 여름 내내 소련에서 쿠바로 무기가 수송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쿠바로 들여가는 소련 무기에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확실한 정보는 아직 없었다. 미국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워싱턴의 우려는 계속 커져 왔는데 지금 케네디가 보고 있는 이 사진 한 장이 마침내 미국의 우려를 사실로 바꾸어 놓았다. 여론은 소련이 미사일 배치를 마무리하기 전에 빨리 쿠바 섬 침공을 시작하라고 케네디를 압박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소련이 미국을 침략한다고 간주할 만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정면 대결을 회피한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핵전쟁을 감수할 각오까지는 없었다. 이제 여남은 날이 지나면, 늦어도 10월 26일이면 언제든 핵미사일을 미국을 향해 발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정보도 책상에 올라와 있었다. 따라서 미사일을 발사할 준비가 끝나기 전인 24~48시간 안에 반드시 미군이 쿠바를 침공해야 했다. 케네디는 미군 25만 명을 영내 대기시키고 전투를 준비하게 했다. 같은 시각 쿠바에서는 핵미사일을 발사 단추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미사일은 미국 본토를 겨누었다. 사진을 본 지 6일 후인 10월 22일 케네디가 방송으로 연설했다. 그는 누가 승리의 열매를 손에 들더라도 재만 남을 전쟁에 대해 경고하면서 소련에 쿠바섬에 설치한 핵무기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추가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군함에 쿠바를 ‘격리’하라고 명령했다. 지금 더 많은 탄두를 실은 소련 선박이 쿠바에 근접하고 있었다. 다음 한 주 동안 어느 순간이라도 미국과 소련은 충돌할 수 있었다. 미국도 소련도 숨을 죽였고 둘을 지켜보는 세계는 겁에 질렸다. 쿠바에 주둔한 소련군은 케네디의 방송 3일 후인 10월 25일에 미사일 발사 준비를 끝마쳤다. 격납고에 수평으로 보관된 미사일을 발사 명령 즉시 사일로로 운반해 핵탄두를 장전한 뒤 수직으로 들어 올려 연료를 공급하고 핵 단추를 누르면 예정된 탄도를 따라 미국 본토 어디론가 정해진 대로 날아갈 것이다. 발사 명령이 내려진 순간부터 발사까지 5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미군 25만 명이 총열을 분해해 닦고 있을 때 소련 미사일 부대원들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 뒤 6일 동안 인류는 인류 종말 전쟁의 벼랑 끝자락을 걸었고, 그때 인류가 얼마나 재앙에 가까이 다가갔는지를 며칠 뒤에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흐루쇼프와 케네디. 둘이 재임하는 기간에 인류는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처했다.

  미국에 비하면 소련의 정보 수집 능력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10월 24일 늦은 밤. KGB는 그때 케네디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KGB 요원이기도 한 러시아 타스Tass 통신사 워싱턴 특파원 고르스키는 바가 문을 닫을 때가 다 되어서 내셔널 프레스클럽에 들어섰다. 마침 바텐더 프로코프는 러시아 망명자였다. 프로코프는 고르스키에게 몇 시간 전에 두 미국 기자가 은밀하게 나눈 깜짝 놀랄만한 사적인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고 전했다. 미국이 공격을 시작할 시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고르스키는 곧바로 소련 대사관으로 들어가 모스크바에 긴급 메시지를 보냈다. 모스크바는 워싱턴보다 8시간 빨라 새벽이었다. 비서가 자고 있던 흐루쇼프를 깨웠다. 그날에서 40여 년이 지난 뒤 당시 흐루쇼프를 깨웠던 비서는 인터뷰에서 보고를 받은 흐루쇼프가 ‘자신이 꽤 더러운 일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멈추기 위해 대화를 해야 하는데….’하고 흐루쇼프가 혼잣말했다고 회상했다. 술집에서 두 기자가 나눈 은밀한 대화와 그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바텐더. 우연이 세계 3차 대전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러시아 대사관에서 나온 타스 통신 기자는 장엄한 아바나 말레콘 위로 스프레이처럼 뿌려지는 대서양 바다의 물보라와 고급스러운 건물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아래를 걷고 있을 아름다운 쿠바 여인들을 떠올렸다. 이제 해가 뜨면 쿠바의 모든 것은 그날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워싱턴에 있는 자신도 핵 화염 속에서 그들과 동시에 사라지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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