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승리
방어
코코넛 야자나무가 희고운 긴 모래밭을 감싸고 있는 히론 해변. 모래를 파 세운 콘크리트의 참호는 지금은 세월이 지나 소나무 껍질 벗겨지듯 헐어 뜯어졌어도 역사적인 전투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의 증거다. 침략자들이 상륙하기 며칠 전에 피델은 섬 전체의 주요 지점에 이런 방어 시설을 세우도록 했다. 쿠바는 미국이 침략하리라는 것은 물론 상륙할 세부적인 지점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침공 계획은 은밀하게 유지되어야 했지만, 마이애미에 있는 쿠바 망명자들 사이에서 이 계획은 공공연한 상식이었다. 또 쿠바 정보부가 1960년 10월 초에 과테말라의 게릴라 훈련 캠프에 대해 벌써 알고 있었고, 쿠바 언론은 CIA의 준비 과정을 널리 보도하기까지 했다.
1961년 4월 15일 밤 니카라과 해안에 항해 중이던 미국 항공모함에서 쿠바 국기가 그려진 B-26 폭격기 3대가 이륙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사용했던 프로펠러 달린 구식 폭격기 B-26에 쿠바 국기를 그려 넣어 마치 쿠바 망명자들이 비행기를 훔쳐 공습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CIA의 아이디어였다. 폭격기들이 쿠바 공군기지를 폭격했다. 몇 되지 않지만, 쿠바 전투기를 미리 파괴해 상륙하는 필리부스테로들을 공중에서 위협하지 못하기 위해서였다. 이틀 뒤인 4월 17일 새벽 4시 미국 무기로 무장한 1,500여 명의 침략자들이 피그만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쿠바 영해에 들어서자, 보트는 니카라과 국기를 내리고 쿠바 국기로 바꿔 달았다. 필리부스테로들은 이 순간을 기념 촬영해 기록으로 남겼다. 이 사진 한가운데 최고 지휘자인 CIA 요원은 홀리데이를 즐기는 관광객처럼 이를 내보이고 웃고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해안에 접근했을 때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고 이것은 홀리데이 여행이 아니었다. 필리부스테로들을 태우고 해안에 접근하던 배들이 침몰했다. 사냥개의 송곳니처럼 솟은 석회암들이 배 바닥을 뚫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냥개의 이빨처럼 솟은 바위들이 이 해변을 뒤덮고 있다는 정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선발로 해안에 침투한 CIA 소속 수중 침투조 7명이 정찰을 마치고 ‘장애물이 없다’라는 신호로 불을 깜빡였다. 수송선 4척에 탱크까지 실은 중무장 병력 1,400여 명이 이 신호를 보고 해안으로 나아갔다. 소형 상륙정이 해안에 배를 대려는 순간 미리 참호를 파고 기다리던 쿠바 민병대원이 쏜 총탄이 새벽의 정적을 찢었다. 쿠바 군인들도 뒤따라 사격을 시작했다. 겨우 살아 뭍에 오르기는 했어도 침략자들의 총과 탄은 벌써 바닷물에 젖었으므로 이 작전을 사전 계획대로 전개할 수 없었다. CIA는 상륙작전을 좀 더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하고 싶었지만, 쿠바 라디오 방송국이 미리 해변에 나와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략자들의 상륙 상황을 야구 중계하듯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생중계했다. 새벽 4시였지만 마을에 사는 어부들도 아직 어둑한 새벽하늘에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아버지와 형제, 이웃들과 함께 참호로 뛰어 들어가 해안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 마을에는 11개의 소총이 있었고 어부들은 ‘그들이 침략했다, 조심해라!’ 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과테말라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훈련을 받았던 공수 대원들은 작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에 착지했다. 쿠바 공군기는 해변에 상륙하는 침략자들에게 총탄을 쏟았고 두 척의 호위함을 침몰시켰으며 CIA의 항공 지원도 무력화했다. 미국이 급습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피델은 대다수 비행기를 비밀스러운 곳으로 위장해 감춰두었으므로 이틀 전의 공급에서 쿠바 공군기는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쿠바 공군은 계속해서 공중을 장악했고, 카스트로는 2만 병력에 해안으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CIA는 두 차례의 공습을 비롯해 더 충분한 공군력을 동원해 공중을 장악하고 상륙을 시작하기 직전에 C-46, C-54 수송기에 낙하산 공수부대를 투하해 후방에서 쿠바군의 이동을 방해하고 쿠바군을 격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을 드러나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한 케네디가 공중 지원을 축소하라고 명령했으므로 CIA는 공중을 장악하지 못했고 상륙부대를 위해 충분한 공중 화력을 쏟아붓지도 못했다. CIA가 장악하지 못한 하늘을 쿠바 공군기가 위장막을 걷어내고 밤하늘을 날아와 해안에 접근한 망명자들의 배에 사격했다. 상륙작전의 첫날 전황을 보고받은 케네디는 CIA가 ‘은밀하면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이 계획이 실제로는 ‘은밀하기에는 너무 크고, 성공하기에는 너무 가능성이 적을 수 있는’ 작전이라고 비로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갓 취임한 젊고 잘생긴 대통령이 브레이크를 밟기에 때는 너무 늦었다. 케네디의 좌절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황이 나아지지 않자, 케네디는 4월 19일 새벽에 또 다른 작전을 승인했다. 아무런 국적 표시가 없는 6대의 미국 전투기가 B-26 항공 편대를 방어하기 위해 이륙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B-26은 한 시간 전에 이미 쿠바 공군에 의해 격추되었다. 6대의 미국 전투기는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는데, 니카라과와 쿠바 사이의 시간대 차이를 몰라 생긴 작전 혼란으로 알려졌다.
케네디는 감추고 싶었지만, 격추된 B-26이 미국의 개입을 증명하고 말았다. 상륙부대도 해변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케네디는 두 번째 공습을 취소했다. 3일 만에 침략자들은 항복하고 말았다. 이 작전에서 필리부스테로 114명이 사망하고, 1,1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일부는 식인 상어가 헤엄치는 난바다로 헤엄쳤다. 쿠바군은 176명이 전사하고 500여 명 부상했다고 밝혔다. B-26 폭격기를 몰던 미군 조종사 4명과 CIA 요원도 1명 죽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은 CIA가 갓 취임한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포로로 잡힌 필리부스테로들은 농장주 100명, 저택을 가진 토지 소유자 67명, 공장주 35명, 사업가 112명,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산을 가진 유한계급 194명, 바티스타 정권의 군인 194명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들은 바티스타 권력 아래서 혜택을 보았던 계층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1961년 5월부터 수감자들의 몸값을 협상했다. 카스트로는 부상자와 병사 60명을 미리 석방하는 ‘아량’까지 케네디에 베풀어 주면서 1962년 말까지 1,113명을 풀어줬다. 미국은 쿠바가 협상 초기에 요구한 금액의 두 배에 가까운 5,300만 달러어치의 식품과 의약품을 쿠바에 제공하고서야 이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비평가들은 피그만 침공 작전을 ‘완벽한 실패’라고 단정했다. 젊고 잘생긴 케네디는 공격적이지 못하고 결단력도 부족한 지도자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CIA의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미국의 분석가들이 침공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작전은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어 있었다. 피델이 했던 것처럼 기습 상륙해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이며 곳곳에서 소요를 일으키면 혁명에 반대하는 쿠바 민중이 대대적으로 봉기할 것을 예상해 최소의 병력을 보낸 것부터 명백한 오판이었다고 분석했다. CIA의 각본은 별 저항 없이 3개 지점 해안에 상륙해 거점을 확보하고 비행장을 장악한 다음 망명 정부를 세우고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요청하면 미국이 개입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니카라과 해안에 미 해군 항공모함 에섹스 호와 구축함 5척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륙지점인 피그만이 깊은 늪지대로 이동하기 힘든 곳이며 해안은 사냥개의 송곳니를 닮은 석회암으로 뒤덮여 있다는 특징마저도 CIA는 사전에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CIA가 침투계획을 짜며 보았던 지도가 50년 전에 만들어진 지도였다는 점도 놀라웠다. 피그만에 침투하기 1년 전인 195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피델이 헬리콥터를 타고 와 첫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을 사람들과 즐겼고 몇 달 뒤 이곳에 153개의 객실을 갖춘 리조트가 완공되었다. 1961년 5월에 이 리조트에서 쿠바 독립 59주년 및 미군 점령 종식 1주년 기념식을 했지만, CIA는 그런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침략자들이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뭍에서 환영의 표시인 듯 환하게 비춘 불은 리조트의 가로등이었다. 분석가들은 가장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 쿠바 국민은 피델 정권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지지하지 않았는데도 CIA는 침공하기만 하면 혁명 정부에 반대하는 쿠바 국민을 조직해 정권을 쉽게 전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반대였다. 2만 5,000명 쿠바군과 20만 민병대를 미국은 허수아비로 여겼다. 쿠바 국민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이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분석가는 케네디 정부 수뇌부가 제정신이었는지 의심스러울 만치 얼토당토않은 계획이었다고 평가했다. 쿠바 민심을 잘못 판단한 것이 첫 번째 패인이고, 피그만이 광활한 늪지와 석회암 바위가 펼쳐져 있는 지리적 특징도 고려하지 않았다. 작전 정보가 사전에 샌 것도 문제였다. 작전이 실패하자 케네디는 불같이 화를 냈다. 국가안보실 회의에 참석한 케네디의 참모 누구도 이런 잘못된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케네디를 비롯한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보좌관,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등 결정에 참여한 7인이 모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자란 하버드대 출신의 친구 사이였다. 서로 워낙 친했고 또 자존심 강한 이들은 여러 번 열린 전략회의 동안 침공 계획의 무모함이나 터무니없는 결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미 행정부가 '집단사고'에 매몰되었기 때문이었다. 뒷날 케네디는 CIA와 측근들이 자신을 속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토록 어리석었단 말인가’라며 고개를 떨궜다. 뉴프런티어 정신을 외친 케네디는 피그만에서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침공 실패를 만회해야 하는 케네디는 카스트로 암살 작전을 포함해 쿠바 정부를 흔들고 경제를 취약하게 만들 새로운 보복 공작을 시작했다.
미국을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피델이 승리했다. 혁명 정부는 ‘미 제국주의를 남미에서 좌초시킨 최초의 사례’, ‘이제 우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미국에 좀 더 자유로워지게 되었다’라며 정권 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10월 위기가 쿠바 국민을 위한 훌륭한 학교 같았고, 마침내 쿠바는 미국이라는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체 게바라는 케네디와 침략자들에게 고맙다고도 했다. 혁명 정부는 ‘조국을 침공한 미제의 앞잡이 명단’을 발표해 군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광범위한 숙청이 이어졌다. 10만 명 가까이 대형 극장과 나이트클럽 시설에 감금되었다. 미국의 침공 실패가 혁명 반대 세력을 솎아내고 혁명에 따른 혼란으로 불안해하던 쿠바인들을 단결하게 했다. 미국은 피델의 체제를 파괴할 의도였으나 실제로는 피델을 더욱 영웅적인 지도자로 위상을 굳히게 되었다. 피델마저도 케네디에게 고맙다면서 조롱했다. 미국의 굴욕적인 피그만 패배는 쿠바를 러시아와의 품에 확실하게 밀어 넣은 꼴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쿠바의 적대적 관계의 뿌리가 되었다. 1961년 11월 마침내 카스트로는 자신이 언제나 사회주의자였으며, 쿠바 혁명은 사회주의화 된 동유럽 국가들의 훌륭한 혁명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마침내 선언하고 소련과 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련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해 달라는 편지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