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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44 빅토르 하라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닉슨과 키신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미 마르크스주의자 아옌데 정권을 종식하기로 했다. 갓 임명된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을 앞세운 군사쿠데타는 칠레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근절하고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목표였다.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에 비가 내렸다. 전투기가 아옌데 대통령 궁을 폭격했고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이 탱크와 기관총, 대포를 쏘고 공격하는 군인들과 교전을 벌였다. 미국이 배후 조종한 피노체트 군부가 포탄을 비처럼 쏟아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다. 헌법은 정지되었고, 의회는 해산되었으며 퇴역 군인들이 국가의 요직을 모조리 차지했다. 사법부는 비상계엄위원회의 하위 기관에 부속되었고 군사위원회가 입법부를 대체했다. 쿠데타 날부터 칠레는 전쟁 상태였다.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공산당 등 야당 관련자들과 민중들을 투옥, 고문, 학살한 잔혹한 폭압 통치가 1988년까지 계속되었다. 피노체트는 모든 누에바 칸시온 녹음 자료들을 압수하고 불태우라고 군부에 명령했다. 피노체트가 탄압하고 있는 세력에게 음악은 매우 중요한 저항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CIA와 칠레 군부가 국민이 선출한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한 사건을 다룬 영화. 작전명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를 방송 멘트가 나오고 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빅토르 하라는 머리 위로 날아가는 미국 폭격기 소리와 집 벽에 박히는 총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금 가까이 달려오는 군인들의 총구가 그날 집에 머물러 있던 하라 자신을 표적으로 겨누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라는 총검을 꽂은 군인들을 피해 음악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으로 가 학생과 교수들에 합류했다. 다음날 하라를 포함한 학생과 교수들은 경기장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탈의실로 끌려가 잔인한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고 콘크리트 벽은 살점과 피딱지가 들러붙었다. 40발 이상의 기관총탄이 박힌 그의 시신이 판자촌의 큰 경기장 입구 길 한가운데 진열되었다. 기관총 앞에 섰을 때 40세의 그는 <우리 승리하리라Venceremos>를 불렀다. 방송에서 누에바 칸시온은 금지되었고 음반은 판매장에서 압수되었다. 께나와 차랑고와 같은 칠레 인디오 민속 악기도 이제는 연주할 수 없었다.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들은 프랑스나 미국,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로 피신했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이끌었던 빅토르 하라는 누에바 칸시온은 ‘시위장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닌 사랑 노래’라고 정의했다. 그 사랑은 연인의 사랑이 아니라 삶과 가족, 사회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었다. 달콤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래할 이유가 있기에 노래한다는 하라는 인디오들이 누에바 칸시온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백인들의 지배나 소외, 가난, 문화적 침탈에 맞서는 혁명적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와 아옌데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으로 사랑, 평화, 사회 정의를 노래했고 피노체트 정권에서 억압당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 시인과 함께 칠레의 3대 정신으로 존경받는다.


  1967년 쿠바에서 열린 ‘저항가요cancion protesta의 등장’이라는 공연에서 ‘저항가요’라는 용어와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개념어가 처음 제시되었다. 라틴아메리카 18개국에서 온 50여 명의 공산당원 뮤지션들이 공연에서 생각과 경험을 교환하면서 가수와 노래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연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들에게 노래는 미국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투쟁하며 ‘우리 아메리카’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졌으므로 민중을 위해 사용될 무기가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저항 가수들은 예술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혁명 활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뮤지션들은 민중 속에서 함께 일하고, 민중들이 겪는 사회적 어려움과 문제점에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라별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조건과 음악적 환경이 달랐지만 누에바 칸시온은 라틴아메리카를 하나로 묶어주는 우산이 되었고, 그들이 자국에 돌아가 정치적 투쟁에 헌신하고 나아가서는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혁명 세력과 연대하고 또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어느 동맹에도 속하지 않은 제3세계 국가들과 직간접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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