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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46 카바레

카바레

  인간 사회는 하나의 표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사일 위기가 해소되자 4~5년 동안 쿠바 사회는 긴장이 누그러졌다.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쿠바인들은 다시 카바레를 찾았다. 백인의 전유물이었던 <트로피카나>나 <아바나 리브레> 같은 호화 나이트클럽들이 흑인과 물라토들로 구성된 밴드들을 초청해 연주하게 했고 백인과 함께 여러 피부색의 손님들이 음악에 맞춰 맘보와 탱고 춤을 추었다. 바티스타 정권 때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혁명 정부의 인종 차별 철폐 정책이 카바레의 풍경까지도 바꾸었다. 혁명 초기의 쿠바는 인류가 동경해 온 희망과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 나라,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에 성공한 존경받는 나라로 우뚝 섰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들에게 카바레와 나이트클럽은 딜레마를 품고 있는 사안이었다. 유머가 있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채워진 볼레로와 댄스곡이 압도적인 레퍼토리였다. 아티스트들은 자신과 신곡을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요란한 헤어스타일과 무대 복장과 스테이지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다. 시퀸sequin이라는 반짝이는 작은 원형 비늘로 몸을 감싸듯이 장식한 무대복을 입고 최소한의 신체 부위만 가린 반라의 많은 수의 여성 코러스를 배경으로 세우고 맨살을 다의 다 드러낸 멤버로 구성된 대형 오케스트라 밴드의 악기들이 대형화하는 카바레 조명에 번쩍번쩍 빛나는 무대 구성이 유행했다. 혁명 이론가들에게 카바레 쇼는 타락하고, 성적으로도 문란해 ‘카바레 룸펜’, ‘카바레 좀비’들이 흥청망청하는 적폐의 공간이었고 인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를 교육하려는 혁명 정책의 추진을 방해할뿐더러 쿠바 혁명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고 사회 개혁에 관한 진지한 토론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혁명의 목표에 반하는 온상이었다. 그러나 쿠바 민중들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무대에서 공연하는 퍼포머들을 사랑했고 카바레와 나이트클럽은 인기 있는 밴드 음악인들의 연주를 듣고 볼 수 있는 쿠바 문화의 중심이자 쿠바음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민중들은 그런 업소들이 문을 닫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혁명 정부는 1962년 대부분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를 국유화해서 운영했고 그마저도 상당수는 폐쇄했다. 가장 대표적인 클럽이 아바나의 부유한 휴양지 마리아나오에 있었던 마리아나오Marianao 소셜클럽과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 소셜클럽이었다.

로스 반반이 속한 아바나 소셜 클럽의 쇼

 이 고급 소셜클럽들은 혁명 이전에 철저하게 인종과 계급을 차별했다. 혁명지도자들이 쿠바 사회의 인종과 계급을 차별한 상징이라고 판단한 두 클럽이 가장 먼저 문을 닫는 운명을 맞았다. 국가가 국민의 댄스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사회센터를 카바레 대신 운영했는데 이마저도 빠르게 폐쇄했다. 이제 혁명 직전에 유행했던 차랑가charanga는 몇 안 되는 국영 소형 카바레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혁명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60년대 중반까지는 정부의 인정을 받은 많은 밴드가 정부 지원도 받고 방송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없었던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방송국 연출자들이 출연 섭외 때 밴드 음악인들에게 가사나 중간 애드리브 파트에 사회주의 개혁에 관련된 이슈에 공감한다는 식의 표현을 넣은 곡을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뮤지션들이 공산주의나 정치적 이슈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무관할 수는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단일 대오로 똘똘 뭉쳐 미국과 싸우고 새 시대 새 사회를 향해 개혁해 가던 혁명 쿠바에 균열의 불씨가 일기 시작했다. 춤과 음악이 발화점이었다.      

선정적이고 화려한 아바나의 나이트클럽과 카바레 공연. 국민들은 이런 쇼를 좋아했지만 혁명가들은 혁명을 오염하는 문화로 보았다.

  마르크스 사상은 사람들의 ‘즐거움’의 감정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은 엔터테인먼트나 댄스 뮤직을 혁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반동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쿠바 정부는 예술이 민중들의 삶과 계급적 이익에 더 긴말하게 결합하여야 한다고 음악인들에 압력을 주었다. 변화한 시대정신에 호응하지 않고 돈벌이로만 하는 문학과 예술은 자본주의에서 나온 반인간적이자 반혁명적이므로 쿠바에서는 거부된다고 했다.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도덕을 최우선으로 지향해야 했고, 정부의 통제를 받는 연예 제작자 협회들은 카바레와 나이트클럽 공연 연출에서도 품위와 고상함의 ‘도덕’적 가치를 끌어들였다. 유명했던 댄스 음악 밴드들은 카바레가 아닌, 생산 목표를 달성한 공장이나 품질 개선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를 인정받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집단농장 같은 곳에서도 공연해야 했다. 이제 댄스 밴드와 음악은 혁명 정신을 고양하고, 혁명 공헌자들에게 포상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혁명 보위위원회 창립 기념일 같은 대규모 행사에 동원되는 것은 물론이요, 사탕수수 수확을 독려하는 노무지원단에서 밴드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도 쿠바에서 댄스 뮤직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민중들이 그것을 강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아바나의 혁명광장에서 군중들을 모아 정치 집회를 개최하려면 그 당시에 유행한 로스 반반Los Van Van같은 차랑가 밴드를 데려와 공연하지 않으면 군중들이 모이지 않았다. 이 또한 혁명의 현실이었다. 마뜩하지는 않아도 댄스 밴드를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 정부에서도 음악인들은 다시 그렇게 취급되었다. 

혁명 시기에 대중들에게 인기 많았던 그룹 로스 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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