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살사
살사
1950년대까지 할리우드의 콘텐츠 투자 배급사는 창작자와 미니멈 로열티 방식으로 창작료 지급 계약을 했다. 창작자는 일정하게 정한 금액인 미니멈 개런티를 받고 음반사에 자기 곡에 대한 권리를 양도했다. 이번 음반이 잘 팔려 자기 이름값이 올라가면 다음 계약 때 더 좋은 개런티를 받을 수 있었다. 저작권 계약에서 자본은 창작자에 절대 우위였다. 쿠바 음악인 가운데서 미국 음반사와 동등한 지위에서 협상할 수 있는 창작자는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성공한 에르네스토 레쿠오나와 곤잘로 로이그Gonzalo Roig 두 사람 정도였다. 두 작곡가는 쿠바작가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저작권료를 유리하게 교섭하게 했다. 혁명이 일어난 뒤 정부는 이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 쿠바음악저작권위원회를 설치해 교섭을 대신하게 했다. 이 기구는 미국 자본이 쿠바 음반시장을 싼값에 차지하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것을 핵심 목적으로 삼았다. 쿠바의 음반 창작물들은 이미 국유화돼 있거나 원저작권자들이 조국을 버리고 외국으로 망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 기구가 음반 제작과 배급, 그리고 소유한 창작물들의 저작권 관리 등 거의 모든 쿠바음악의 저작권 사업과 관련한 활동을 맡았다. 그러나 혁명 뒤로 쿠바는 미국에 봉쇄되었고 쿠바 댄스 음악은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저작권 사업도 많이 위축되었다. 쿠바는 이미 배급제 사회로 국가가 이미 그들에게도 정해진 급여를 지급하고 무상의료 같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또 퇴직 후 연금도 지급하고 있었다. 정부는 그들이 저작권료를 따로 더 받아야 하는지 검토했다. 음악인들에게 저작권료를 따로 지급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평등사상에도 어긋나고, 체 게바라가 강조한 물질적 동기보다는 도덕적 동기를 중시하는 ‘새 사람’의 생각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혁명지도자들에게 예술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어야 했다. 예술이 민중에게 돈을 받으면 그 돈은 최종적으로 소수의 창작자에게 집중되고 결국은 예술도 인민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예술은 인민을 착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민을 위한 선물이 되어야 했다. 1967년 모든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재를 정부예산으로 저작권료를 내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피델은 모든 학생은 교재를 무료로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카스트로는 쿠바 작가 예술인 조합에서 쿠바에서 저작권료라는 제도를 없앨 것을 제안했고, 조합의 예술인들도 투표로 그 생각에 동의했다. 학생과 학교는 교재가 필요하다면 외국의 출판물도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말고 복사해서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쿠바는 국제 저작권 협약에 서명을 거부했다.
1962년부터 미 해군은 쿠바로 드나드는 모든 배를 봉쇄했다. 미 해군의 봉쇄는 500년 동안 가장 최신의 음악과 춤을 세상에 공급해 준 쿠바 음악도 카리브해역 밖으로 새 나오지 못하게 봉인했다. 쿠바 봉쇄는 1940년대부터 라틴 음악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 유행의 발신지로 자리 잡아가던 뉴욕이 음악에서도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될 기회가 되었다. 세계 비즈니스의 중심인 뉴욕은 레코드 제작사, 영화사 등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기업과 텔레비전, 라디오 같은 미디어 산업의 중심이기도 했다. 그때 이미 뉴욕은 세계 사람이 선망하는 세계의 수도였고 아바나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뮤지션이 할렘으로 모여들었고 할렘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이주해 온 아프리칸-아메리칸들을 중심으로 블루스와 재즈에서 탱고와 맘보, 랩과 힙합까지 많은 장르의 음악의 산실이 되어 있었다. 쿠바 혁명이 있던 해 뉴욕에서는 볼룸 룸바ballroom Rhumba, 차차차, 콩가conga 같은 쿠바에서 건너온 댄스 뮤직이 유행했고, 뉴욕이라는 발사대에 실린 쿠바의 춤과 음악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쿠바와 미국의 관계가 악화함에 따라 춤과 음악의 세계에서 쿠바가 갑자기 사라졌고, 예술 공간은 큰 진공이 생겨났다. 이제 세계 사람들이 정말로 많이 사랑했던 쿠바의 새로운 음악과 춤을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들을 수도, 따라 출 수도 없게 되었다. 최고 호황기를 누리는 미국에서 쿠바의 댄스 음악에 대한 수요는 매우 컸다. 마법처럼 쿠바음악이 사라지고 생겨난 진공의 공간을 미국의 음반 프로듀서들이 독차지했다. 이 빈 곳을 가장 활발하게 뛰어다닌 플레이어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작곡가 파체코와 공동 창업자 변호사인 제리 마수치였다. 피델의 저작권 협약 서명 거부는 파체코와 그의 변호사에게 쿠바음악의 모든 지적 재산 권리를 갖다 바친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 쿠바 정부는 혁명 정신을 오염시킨다며 댄스 뮤직을 억압했으므로 쿠바음악의 자산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이점도 파체코가 쿠바의 유명한 곡들을 거저 가져다 돈벌이하는데 더없이 좋은 여건이 되었다.
모든 지식은 모든 인간에게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쿠바가 국제 저작권 협약에 가입하지 않자, 쿠바 음원의 지식재산권은 미국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쿠바는 음악 등 모든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료를 외국자본에서 받아내지 못하게 되었고 쿠바에 큰 손해를 초래했다. 쿠바가 사실상 저작권을 개방한 것처럼 된 것을 안 미국과 유럽 음반사들은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봉쇄 등 미국과 쿠바의 갈등이 매우 고조되었을 때 뉴욕 음악계에서 살사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파체코의 파니아 레코드가 ‘살사’를 전통적인 ‘쿠바 스타일의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처음 쓰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살사라고 부르는 음악은 쿠바 사람들이 '춤을 출 수 있는 음악música bailable'이라고 부르는 쿠바음악의 전형인 손son이다. 미국이 쿠바를 소련에 버금가는 적대 국가로 비난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쿠바음악을 홍보하는 데 ‘쿠바’라는 단어는 도움이 안 되었다. 파체코는 “우리도 처음에는 쿠바 뮤직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굳이 C.U.B.A라는 부정적인 4글자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누군가 ‘쿠바음악’을 대체할 새로운 명칭을 쓰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천재적인 발상이었죠. 새 이름으로 ‘쿠바’라는 단어를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포장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나온 것이 살사였어요.” ‘살사’는 귀에 착 달라붙으면서도 맛깔스럽게 들리고 신나는 재미를 줄 것 같은 음악이라는 기대감을 함축하는 단어로 완벽했다. 부르기 쉽고 더 직관적이며 새로 등장한 장르의 음악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 단어는 앨범의 재킷이나 포스터, 전단, 광고 같은 마케팅에 딱 어울리는 단어였다. 미국인들의 교활한 의도였든 어쨌든 무엇보다도 냉전 시대 미국의 적인 ‘공산주의 쿠바’라는 원산지 이미지를 말끔하게 덮어주었다. 그래서 살사는 특정한 스타일의 음악 장르를 가리킨 이름이 아니라 미국 음악인 재즈나 록이 아닌 쿠바의 모든 음악이 다 살사였다. 라틴 음악을 전문으로 제작하고 홍보하는 파니아 레코드가 그렇게 홍보하자 다른 음반사들도, 방송사들도 파니아를 따라 했다. 파니아 레코드는 원곡자인 쿠바 뮤지션들의 동의 없이 함부로 곡을 바꾸거나 통째로 편곡해 프린트하는 일이 흔했고, 심지어 원곡자에게 돌아가야 할 저작권료 몫을 편곡료라는 명목으로 몽땅 챙겼다. 심지어는 새로운 곡 제목을 붙인 뒤 미국인 편곡자를 원저작자인 것으로 표기하고 새로 커버한 가수가 원작 가수인 것으로 저작권을 등록했다. 쿠바 원저작자의 이름과 권리는 그렇게 말끔히 가려졌다. 파니아 레코드는 1960년대 말부터 인기 있는 쿠바음악 앨범을 대량으로 프린트했다. 저작권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낮은 가격에 팔 수 있었던 파니아 레코드는 1970~80년대에 ‘살사’라는 이름을 퍼트리며 세계 라틴 음악 시장에서 사상 최대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미국이 ‘살사’라고 하니 세계가 모두 쿠바음악을 ‘살사’라고 불렀다. 쿠바 음악인들은 미국 음악계와 미디어가 ‘살사’라고 부르는 일에 대해 쿠바음악을 미국의 지엽적이고 주변적인 음악으로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곧바로 비판했다. 실제로 미국의 봉쇄는 설탕뿐 아니라 쿠바음악도 미국 등 외국에 진출하지 못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쿠바는 미국인들이 쿠바음악을 팔아먹는다며 미국의 심각한 부도덕성을 고발했다. 쿠바의 한 기자는 “미국이 쿠바를 경제적, 외교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을 마치자, 이제는 상업적으로 쿠바음악을 뺏어 먹고 재활용하고 있다. 살사라고 하는 괴상한 이름을 붙여 세상 사람들에게 쿠바 음악이 아닌 것으로 인식시키고 불분명하고 허구의 이미지로 포장해 미국이 만든 뭔가 새로운 음악인 것처럼 꾸미는데 이 짓은 미국의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돈벌이 기술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지식재산권을 훔쳐둔 음원을 미국 레코드사들은 오늘날에도 "D.R"이라고 프린트해 팔고 있다. 미국인들의 이런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쿠바인은 없다.
창작자는 크리에이티브 작업에 대해 돈으로 보상받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였던 바티스타 시대까지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혁명 뒤 지금 창작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이해도 되지 않았고, 견딜 수도 없었다. 많은 대중이 부르는 노래를 창작한 대가로 공무원의 비서나 회계담당자나 별 재능 없고 성과도 없는 무명의 뮤지션처럼 똑같은 급료를 배급받는 이 현실에 수긍할 유능한 창작자는 없었다. 그들은 적은 급료를 받는 만큼만 최소한으로 창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쿠바에서는 누에바 트로바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가의 노래 말고는 새로운 창작곡을 들을 수 없었다. 정부는 이 상황을 전환하려고 전국적인 신곡 경연대회를 열고 상금까지 내걸어 보았지만, 그런 것은 창작자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창작자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은 쿠바 정부의 정책은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많은 음악인이 조국을 떠나게 했다. ‘쿠바의 목소리’로 쿠바 인민의 사랑을 받은 셀리아 크루즈, 오스발도 파레스Osvaldo Farrés, 올가 기요트 Olga Gillot, 에르네스토 레쿠오나 같은 세계적인 스타 뮤지션들이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살던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분노했다. 무엇보다도 크리에이티브 영역에 대한 혁명 정부의 인식과 정책은 창작자들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고, 그들은 결국 조국 쿠바를 떠났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들은 혁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을 쏟아냈다.
1975년 피델 정부는 실패를 인정하고 ‘문화적 성과에는 특별한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라는 공산당 결의를 도출해 뛰어난 예술가들은 큰돈을 별도로 보상받을 수 있게 정책을 바꾸었다. 1978년 쿠바는 저작권법을 바꾸었다. 모든 지적 상품은 온전히 사회의 소유가 되게 한다는 것이 최종의 목표라고 인식하면서도, 다시 말해 음악인들은 그것들을 만들면서 예술가들이 인민대중에게 제공해야 할 보상 없는 선물로써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예술가들의 권리도 보호하고 예술가 스스로 적절한 방식으로 그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음도 인정한다는 것이 새로운 저작권법의 취지였다. 저작권법의 변화는 쿠바 경제에 시장 경제라는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84년 미국의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먼은 막대한 자본력이 정보와 프로그램을 독점하면 정보격차가 생기고 그것이 새롭게 계급 격차를 만들기 때문에 프로그램과 정보는 자유롭게 공유되고 서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며 카피레프트 운동을 주창했다. 카피라이트는 타인에게 창작물의 사용 접근을 제한하는 창작자의 권리인데, 지식과 정보는 소수에 독점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