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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50 보트피플

Wet foot, Dry foot

  혁명 다음 해인 1960년 쿠바는 1 주택만 소유하도록 허용하고 그 이상 소유한 주택은 몰수하여 국가에 기여도가 높은 인재와 가난한 이들에게 배분했다. 미국의 경제봉쇄는 모든 물자를 부족하게 만들었다. 농촌에서는 생산한 농작물이 썩어가도 도시로 운송할 자동차가 없어서 도시에서는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자동차가 있어도 고장 난 부품 하나를 구할 수 없으면 자동차는 멈춰야 했다. 혁명 전에도 극빈층이었던 계층은 늘 그런 생활이었지만 중상류층들은 삶의 질이 수직으로 추락했다. 쿠바 국민은 이제 경쟁하는 정당 가운데서 투표로 국가지도자를 선출하는 권리도 박탈당했다. 오직 공산당만이 국가지도자를 정했다. 정부에서 독립된 언론은 모두 폐간되고 기관지만 발행되었다. 그마저도 인쇄할 종이가 부족해 지면도 발행 부수도 줄였다. 길거리에서는 어렵사리 발행된 신문을 읽는 시민을 보기 어렵다.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행하는 혁명을 찬양하는 일변도의 신문을 읽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지역마다 활발하게 수백 년 이어온 그 많던 축제와 콤파르사도 거의 중단되었다. 혹독하기만 했던 식민주의 착취 시대에서도 시골 들판과 도시의 골목에서 불리던 노랫소리도 혁명은 멈추게 했다. 1960년부터 1974년 사이에 해마다 평균 3만 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뒤로도 수십만 명이 지속해서 쿠바를 떠나 선상 난민이 되어 플로리다 해안을 떠다녔다. 이때 10퍼센트가 넘는 인구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피델의 독재정권에 통제되는 언론은 망명자에 대한 통계 수치를 더는 공개하지 않았다. 혁명 정부의 정치적 탄압과 숙청 같은 압력도 탈출 행렬을 현상으로 만들었다. 쿠바를 떠난 이들 중 상당수가 중산층이었으므로 기업과 상점은 크게 줄었고,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의 탈출은 쿠바의 발전 역량에 장기적으로 깊은 내상을 입혔다. 미국에 대항한 대가는 혹독했다. 반대로 미국으로서는 잘 교육받은 전문가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쿠바의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만족할 만한 셈이 되었다. 쿠바인들의 망명 행렬이 피델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 미국은 ‘오픈 도어’라는 이름으로 난민을 받아들였다. 미국은 고학력 전문가집단의 망명을 카스트로 정권의 문제점을 홍보할 수 있는 소재 삼았다. 1966년 미국은 망명하는 모든 쿠바인에 영주권과 시민권을 준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쿠바 사람들을 자극해 플로리다를 향한 배가 줄을 이었고 쿠바를 붕괴시키려는 미국은 쿠바 정부가 해상에서 난민선을 단속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미국의 땅에 발을 디딘 쿠바인은 곧바로 미국인이 될 수 있었다. 

마이애미 해변에서 미국에 상륙하기를 바라는 히스패닉계 보트피플.

     

  불만을 품은 이들이 쿠바를 도망친 것은 한편으로는 혁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측면도 있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사그라드는 효과도 있었다. 떠날 사람이 떠나버린 쿠바는 내부적으로 더 결속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피델 정부도 난민 행렬을 굳이 막지 않았다. 다만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쿠바를 떠난 것은 문제였다. 특히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은 쿠바가 공산주의로 변하는 것을 거부해 대거 탈출했다. 쿠바에서는 이들 전문가집단을 붙잡기 위해 부자들에게 몰수한 좋은 주택을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에게 우선 배정해 잔류를 유도했다. 오늘날 아바나 미라마르 같은 지역의 호화 주택에 누가 사는지, 시엔푸에고스의 아름다운 해안에 있는 흰 고급 요트는 대개 이공계에 종사하는 이들이거나 상속받은 그들의 자녀들이다.      

  쿠바와 서방 세계 사이에 긴장이 높아질수록 음악인들의 해외 활동은 위축되었다. 미국은 쿠바인들에게 비자를 거의 발급하지 않았고, 설령 미국 공연이 성사되어도 관객층인 쿠바 망명자들이 공산주의 쿠바의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미국에 와서 돈을 벌어가려 한다며 공연장에서 선동했다. 차가운 전쟁의 시대에서 쿠바 음악인들이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어쩌다 초청받아 공연해도 불상사 없이 무사히 공연을 마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점도 예술가들이 조국을 배신하게끔 하는 이유가 되었다. 피그만 침공을 계기로 여행 통제법이 생겼다. 반정부 반혁명 인사들의 ‘거사’ 모의를 감시하고 또 자금의 해외 유출을 막겠다고 만든 법이지만 결국 공안 시대를 예고했고, 이제 누구라도 외국에 가려면 국가로부터 사전에 허가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약 10년 동안 쿠바에서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음악인이 아니면 해외에 나가서 공연하도록 허가받기 어려웠다. 성사된 해외 공연도 공안기관이 운영하는 기획사가 추진하는 행사일 경우에만 승인받을 수 있었다. 공연도 쿠바와 사이가 좋은 멕시코와 카리브 연안 국가 정도에 그쳤다. 혁명 전에는 미국, 유럽,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공연했지만 이제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공연하게 되었고, 그것도 개인이나 소규모 밴드가 아닌 대규모 그룹 앙상블 위주로 기획되었다. 공연에는 항상 쿠바 정부 대표단이 동반하고 공안 요원들이 동행했다. 정부 기획사는 음악인들이 해외에서 망명할 것을 경계, 감시하기 위해 공연료를 달러나 현지 화폐가 아닌 쿠바 페소로만 지급했다. 그마저도 목돈으로 주지 않고 그날그날 적은 돈으로 지급했다. 쿠바 페소로는 외국에서 아무것도 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음악인이 이 정책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담배 공장이나 부두에서 하역 노동하면서 밤에 음악을 했던 무명 음악인들이나 혁명 전에는 해외는커녕 대형 카바레에서마저도 공연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유색인들은 혁명 정부의 새로운 여행 정책으로 새로운 기회가 생겼으므로 이를 반겼다. 그들은 새로운 정책의 수혜자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들이 혁명 이후 시대 쿠바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그렇더라도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많은 기획자와 투자자들, 그리고 연주자들이 떠나버린 뒤였고, 또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으니, 이전과 같이 음악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부 문화자문단이 온갖 종류의 뮤직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1965년에는 쿠바가요제(Festival Cuban Song), 67년에는 <국제 저항 음악 페스티벌the International Festival of Protest Music>이 개최되었다. 이 행사들은 아바나 인근의 세계적인 해양 휴양지인 바라데로 해변에서 치러졌다. 이런 멋진 곳에서 행사를 해 외국 관객을 유입시키고 또 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심으려는 의도였다. 

쪽배를 타고 쿠바를 미국으로 향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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