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야 새야 파랑새야
압록강 물길 따라 신의주와 안동을 오가는 강 다리에 이르니 철교의 만듦새가 자못 장엄했다. 다리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차들이 다니는 가운데 길 양옆으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좌우로 나 있고 가운데 찻길과 곁길을 철제 난간으로 막아 사람과 차가 섞이지 못하게 했고 또 사람이 강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막았다. 철교 아래에는 배들이 먹이를 쪼는 까마귀 떼처럼 서로 머리를 잇대고 있었다. 그 다리는 날마다 두 시가 되면 기계로 다리 중앙의 교가를 들어 올렸는데 마치 무거운 대갓집 대문을 여는 듯 위세가 당당하고 거창했다. 교가가 올라가면 그 열린 문안으로 큰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 다리를 건넌 조선인들은 남자는 등지게 짐을 지고 여자는 머리에 보따리를 인 채 한 손으로는 노인들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어린아이들을 이끌고, 노인들은 손자 아이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흔들거리며 마차와 수레를 쫓아 강을 건너는 조선인들이 날마다 수천 명씩 줄을 이었다. 그렇게 다다른 안동의 큰길은 한인들로 꽉 채워졌으니, 마치 조선의 마을들을 모두 서간도로 옮기고 있는 듯했다. 앞사람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앞다투어 길을 나서 강을 건넜으나 노자와 식량이 부족해 배도 채우지 못하고 북만주에서 불어오는 칼날 같은 눈 폭풍에 쓰러졌다. 청인의 땅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나라 잃은 약한 백성들의 통곡 소리는 야윈 몸뚱이를 할퀴는 북풍이 휘몰아치는 서간도에 음산하게 울리고 있었다.
가없는 남도의 초록빛 넓은 들의 끝은 아득했다. 싱그러운 빛으로 뒤덮인 들판 위로 시꺼먼 먹구름이 서로 얽히고설키더니 뭉클뭉클 불어나 꿈틀대며 조선 하늘을 삼켜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괴물처럼 흉물스러운 먹구름은 순간순간 변하더니 내달려 드는 성난 짐승들의 무리처럼 조선 땅을 짓이겨갔고, 도적 패들은 총칼을 든 채 이 땅을 삼키려 몰려왔다. 먹장구름이 몰아온 바람이 들녘을 휩쓸 때마다 가녀린 벼들은 몸을 누이며 시달려야 했다. 몰아치는 바람에 등이 휜 벼들은 이삭이 논바닥까지 닿도록 고통스러웠더라도 끝내 꺾이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다. 남도의 마을들은 넓은 벌판 사이로 띄엄띄엄 앉은 야산들이 몸덩이 작은 여인들처럼 완만해서 산이라기보다는 그저 높직한 둔덕에 해를 받고 들어앉았다. 그래도 모를 심고 벼를 베는 벌판보다야 높았으므로 그것도 산이라면 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조약돌 같은 야산들의 품에 안겨 조선의 마을들은 모둠모둠을 이루었다. 야산은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흘려내려 주어 농사짓게 했고 도타운 햇볕은 초가지붕 오종종한 마을을 이루었다. 한반도의 땅은 그런 땅이었고, 그런 땅에서 사람들은 먹고살았다.
그런 땅에서 일본은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 전쟁했다. 유럽으로도, 인도로도 나갈 길이 막힌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방향을 잡았고 시베리아를 정복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뒤에는 방향을 아래로 틀어 한반도를 들여다보았다. 동진하는 유럽의 제국주의가 북진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부딪쳤다. 그런 조선 땅에서. 처음에는 인천항과 원산항에 군대와 순검을 쏟아 부리더니 러시아를 상대로도 이긴 일본은 더욱 기세가 펄펄해서 목포항, 군산항, 마산항에 정미소와 등대라는 큰 혼불 같은 빛을 바다로 쏟아내는 것을 세워 올린 뒤로는 민간인들까지 정신없이 휘몰려 들었다. 쌀이 넘실대는 호남평야가 있는 영산강과 금강 주변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더니 이제는 평양 이북까지도 왜인들이 몰려들어 차지하지 않은 땅이 없었다. 두억시니들처럼 조선 땅을 꿰어간 왜인들이 기차를 놓고 신작로를 닦아 실어 온 쌀을 군산항, 목포항, 원산항에서 배에 실어 떠난 배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일본이 세운 항구들은 모두 일본의 위성도시 노릇을 하도록 만들어져서 기차와 신작로로 실어 온 쌀을 정미해 일본으로 실어내기 좋도록 도시를 만들었다. 기찻길, 신작로는 말이 일본이 건설한 것이지 실상 그 노동력은 모두 이 구실 저 모함으로 조선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가 삽 한 자루 던져 주고 돌을 부숴 흙을 저 나르게 해서 만든 길들이었다. 등짝을 휘어 감아 맨살을 파고드는 채찍의 힘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철로와 신작로는 쌀만 실어 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땅까지도 빼앗아 갔다. 몇 안 되는 왜인들에 빌어 붙어 이권을 챙기려던 조선인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 고관대작과 왕족들은 나라를 일본에 판 값으로 거대한 은사금을 받았고, 윗물이 그러했으니 작은 마을에서는 일본인 순검에 빌붙어 동포의 피를 빠는 자들도 넘쳐났다. 돈도 조선을 무너뜨린 큰 먹구름이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항에 군대를 부리더니 곧장 한양에 진입시켰다. 무력으로 위협받은 조선은 한일의정서를 조인했는데 이로써 일본이 조선 안에 군사기지를 두는 것은 합법이 되었고, 곧바로 용산에 일본군 기지가 섰다. 1904년 2월이었다. 평양 전투에서 승리해 유리해지자 그들은 그 기세로 조선 정부로 하여금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을 초빙하도록 강요했다. 그해 8월 조선 왕은 일본인 재정 고문과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 고문으로 들어앉혀야 했다. 스티븐스는 미국인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 로비하여 이 자리를 낚은 자로 신흥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일본의 조선 병합을 승인하도록 외교활동 하는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였다. 이로써 나라의 재산권과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했다. 일본은 협정서에도 없던 고문들을 마구잡이로 들어앉혔다. 군, 경찰, 교육 등 행정 전반에 고문이 배치되어 실질적으로 장관의 역할을 했다. 엄연한 협정 위반이었지만 조선 왕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평양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시가전을 벌이며 수천 년 된 민족의 도읍을 부수는 동안 조선 땅은 벌써 꼼짝없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한 스티븐스가 동경에서 일본 상선 니폰마루(日本丸)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왔다.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가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미국이 동의하도록 로비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조선 정부를 대표한 외교부 장관 자격이었으므로 그의 이번 출장의 결과는 고려 민족의 명운에 치명상을 가할 일격이 될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가 미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되는 것에 대한 마땅함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였다. 이는 일본 내각 총리 카쓰라와 미국 시어도르 루스벨트 정부의 국방장관인 테프트 간에 1905년에 비밀리에 합의된 밀약 내용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미국 언론은 이 같은 조선의 외교 고문 스티븐스의 발언을 크게 다루어 보도했다. 이제 스티븐스가 워싱턴에 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승인하게 되면 조선의 명운은 항구적으로 알 수 없게 될 터였다. 1908년 3월 23일 아침 9시 30분 일본 영사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려는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있는 페리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앞마당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총을 쏘았다. 장인환이 쏜 총탄을 맞은 스티븐스는 이틀 뒤 죽었다. 장인환 의사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앞에 있는 섬에 설치된 악명 높은 감옥에 갇혔다. 스티븐스를 쏜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도 그때 돈 20원에 역부를 모집한다는 왜인과 부역 조선인들의 압박으로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다 사탕수수 노동을 견뎌내고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철도 건설 잡역 노동자였다. 그때 돈으로 2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배를 탄 뒤에 돈을 준다는 조건이었으므로 배 탄 뒤로는 가족들이 돈을 떼여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왜인들과 그 부역자들이 배를 탄 조선인들의 가족에게 돈을 다 주었을 리 없었으므로 20원 돈을 다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돈을 온전히 다 받았더라도 바다 건너 수만 리 밖 미국인지 하와인지 하는 곳에 언제 올지도 모를 곳에 몸을 팔아 가기에는 하찮은 돈이었다.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일본인 지주에게 진 빚이 다달이 새끼를 치며 무섭게 불어났고, 어딘지도 모를 땅으로 가는 배에 그들을 태웠다. 말로야 계약을 체결한 역부라 했지만, 한글 한 글자 없이 알 수 없는 문자로만 가득 씐 종이에 손도장을 누르는 것뿐이어서 계약 노예가 된 셈이었다. 장인환과 전명운도 그렇게 손도장을 찍고 정미소 소리 가쁜 부두에서 상해로 가 중국인 쿨리들과 섞여 더 큰 배를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 간, 집에서는 하늘이요 대들보 같았던 아들들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본 조선의 어미들은 눈물을 삭이며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라는 가락을 사무치게 느릿하게 끝낼 줄을 모른 채 길게 땋은 댕기머리마냥 길게 이어진 들녘길처럼 끝없이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