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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Apr 02. 2024

우리는 샹그리아에 미쳐있었다

  우리는 샹그리아에 미쳐있었다. 쉽게 해석되지 않는 메뉴판을 붙잡으면서 이건 무슨 음식일까 번역기를 돌리면서 진지한 메뉴 선정 속에서 가장 반가운 글자는 바로 샹그리아. 맥주 한 잔으로도 얼굴이 빨개지는 나로서 술은 친해지기 어려운 액체지만 그래도 여행에서 음주가 빠질 수는 없으니까.

  레드 빛에 오렌지, 레몬, 자몽 갖가지 과일이 들어간 달달하면서 씁쓸한 와인과 부드러운 꿀대구의 조합은 둘이서 1리터를 비우기 충분했다. 어린 시절에 갯벌 구멍에 소금을 뿌려가며 잡았던 맛조개를 스페인에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고 구워 먹으니 더 맛있고 레몬즙 쫙 뿌리면 입안 가득 즐거움이 뛰어다녔다.

  살짝 취기가 올라 신이 난 발걸음으로 소매치기범이 언제나 대기하는 가우디 성당으로 갔다. 도수가 낮지 않아 알코올 냄새가 풀풀 났을지도 모를 동양 두 명의 소녀가 햇빛에 반짝이는 바르셀로나 거리를 가로질러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자연을 사랑하는 가우디가 만든 성당은 길쭉한 나무 사이에 빛이 들어오는 거대한 아지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천장을 바라보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서 눈을 감았다. 꿈을 꾸었을지도 모를 20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 속에서 제3자의 시선으로 벤치에 앉아 잠을 자는 소녀를 얻었다. 하루를 빠르게 먹어 치우며 주름을 그어가는 내가 퇴근 후 연남동 골목 사이 책방에서 가장 처음으로 쓰고 싶었던 장면이 되었다.

  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은 우주 속 먼지가 어떻게 욕구와 멀어질 수 있을까? 아무리 기록하고 싶어도 결국에는 감정만 남았다. 객관적으로 내가 어디를 갔다 왔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스쳐가는 장면들이 그리움으로 남아 아쉬움을 주기도 하고, 배고파서 먹었던 음식들이 순간순간 떠올라 침을 고이게 했다. 아무리 서울에서 빠에야 맛집을 찾아도 꿀대구를 먹어도 충족되지 않는 괴로움이 언젠간 그곳에 가고 싶어지는 이끌림이 되었다. 돈을 벌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될지도 모를 그런 밤 그리고 굶주린 20대 끝자락에 걸쳐 앉아서 맛조개를 검색하고 있는 나.

  가우디 성당의 매력은 해가 지나가는 궤도에 따라서 들어오는 빛의 색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저 예쁜 빛이네, 사진 찍어야겠다 정도였다. 기분도 생각도 딱 그 정도로 파란색에 가까웠던 해가 지나 이제는 주황색으로 변하고 있다. 아쉬움에 취해 비틀거리더라도 언젠간 충만한 사랑을 하며 미쳐있기를,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든 모든 상관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살짝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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