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이수진, 2019, 브런치 무비패스#5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하소불(丹霞燒佛). 선종회화의 하나로 《경덕전등록》에 수록된 유명한 일화다. 혜림사의 단하스님이 겨울을 나던 중 너무 추운 나머지 목불을 태웠다. 이에 분개한 주지 수님과 사람들이 어떻게 불상을 태울 수 있냐며 비난하자 단하스님은 사리를 찾기 위해 목불을 태운 것이라 말했다. 어이없다는 듯 목불에 사리가 어디 있느냐고 응수하는 주지 스님에게 단하스님은 태연히, 그렇다면 목불은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목불은 불상(佛像)이다. 부처를 본뜬 하나의 상일 뿐, 부처 그 자체가 아니다. 부처 혹은 불법의 본질은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상(偶像).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 그리고 또 하나의 기본 의미. 나무, 돌, 쇠붙이 따위로 만든 신불이나 사람의 형상. 신처럼 숭배되는 우상은 불상처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요, 그 안에 본질은 없다. 또 하나의 상(像)일 뿐이다.
영화 우상은 광화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던 이순신 상(像)의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확대하며 시작한다.
0. 줄거리
구명회(한석규)는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명망 있는 정치인으로 도지사 선거 출마를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아내로부터 급하게 온 연락으로 그는 곧 그의 창창한 앞날을 발목잡을 사실과 마주한다. 아들 요한(조병규)이 그의 차를 끌고 사람을 친 것으로 모자라, 119에 신고하지 않고 이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 것. 구명회는 아들에게 자수 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는 그가 도덕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 편이 그에게 덜 타격이 가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후에 CCTV로 피해자가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 살아있음을 깨닫고, 시신을 사고가 났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나 누구 한 명 사고 장면을 본 사람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들통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받은 련화(천우희)를 어떻게든 찾고자 흥신소에까지 의뢰하며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한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온 유중식(설경구)은 행복한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어야 할 아들 부남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심지어 아들의 아내이자 중식의 며느리인 련화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련화는 임신 중이다. 중식은 련화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 온 언니 수련과 그녀가 전에 일하던 직장 등을 수소문하며 그녀를 찾는다.
두 남자가 애타게 행방을 좇고 있는 련화는 생존을 위해서 위장 결혼도, 몸 파는 일도, 심지어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적이 많다. 중식의 아들과 결혼하여 이제는 무사히 한국에 뿌리내릴 일만 남은 줄로 알았는데, 그녀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중국에서 보낸 살인청부업자와 위장 결혼을 했던 전남편이 그녀를 찾아온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부남까지 행방불명이 되자 그녀는 다시 도망친다.
인물 포스터에서 그려진 바와 같이 각각 명예, 핏줄, 생존을 필사적으로 좇는 세 인물이 얽히고설키며 실타래가 풀린다. 그런데 이 실타래는 영웅 테세우스를 탈출시킨 것처럼 우리를 출구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이달로스의 미궁 깊은 곳으로 잡아끈다.
1. 무엇을 믿느냐 : 믿음은 귀를 막는다
상(像)은 본질이 아니기에 더더욱 귀를 닫고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맹목적이고, 이성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에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영화의 초반부와 클라이맥스에서 유중식은 흐느끼며 말한다. 몸이 불편한 아들의 성욕을 위해 자위를 대신해주던 지옥 같던 나날들에 대해, 아들을 잃고 난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리운 나날들에 대해. 그러나 실은 이를 견디다 못해 아들에게 정관 수술을 했던(극후반부, 연화가 중식의 집에서 들어왔을 때 잘랐다고 고백하는데, 정관 수술로 유추하고 있다) 유중식은 련화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친손주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련화가 추방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에게 혼인 신고서를 건네고, 구명회의 선거 캠프단에 자원하는 등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머릿속에 ‘왜 저렇게까지 하지?’이해할 수 없는 물음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하나뿐인 핏줄이던 아들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이제 련화와 뱃속의 아이만이 상으로 남으며 맹목적으로 변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맹목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영화 부분부분 나오는,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보아도 크게 이질적이지 않을 인물들이다. 중식의 누나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아들을 잃은 중식을 슬픔을 감싸안기보다 구명회가 불출마할 것을 우려하며 중식의 가게에 방문하기를 꺼린다. 그들의 우상은 구명회이기에. 매일 같이 유중식의 아들이 사고 난 도로를 달리던 할아버지는 구명회에게 유리한 쪽으로 증언을 한다. 그 역시 구명회를 우상으로 떠받들기에.
마지막으로 한국어인지 외국어인지 모를 정도로 어눌하게 외치는 구명회의 연설은 프롬프터에 자막이 뜨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열광한다. 어차피 그들의 귀는 닫혀 있기에 또렷이 들리느냐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므로.
2. 무엇을 믿게 하느냐 : 거짓은 입을 통해서 퍼진다
“자네 예수여!”
최의원이 구명회에게 던진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라면 아들의 자수를 자신의 명예가 아닌, 진정한 뉘우침을 위해 요구할 것이며, 흥신소 직원을 차로 깔아뭉개지 않을 것이고, 목격자로 생각한 련화를 없애려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예수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지,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영화 속 대중들이 그를 예수라고 생각할지언정, 그가 예수와 똑같이 본을 뜬 상일지언정 그는 예수가 아니다. 그는 대신, 헤롯 왕이다.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무고한 어린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안디바)다.
헤롯 왕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다시 자신의 부인으로 취했다. 그리고 헤로디아에게는 어여쁜 딸 살로메가 있었다. 헤롯 왕의 생일 잔치에서 살로메가 아름다운 춤을 추었고, 이에 매료된 헤롯 왕은 살로메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말한다. 살로메는 헤로디아에게 가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지 물었고, 헤로디아는 그녀가 헤롯 왕의 부인이 되었을 때 가장 크게 책망했던 사람의 목을 달라 청하도록 한다. 살로메의 청을 들은 헤롯 왕은 소원대로 그 사람의 참수를 명하는데, 그의 이름이 세례 요한이다.
구명회는 자살을 기도한 아들 요한이 사망할 때 모른 척하는 꿈을 꾼다.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아들의 목이 360도 회전하는 환각을 보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명예에 대한 욕망을 다시 한 번 깨닫곤 각성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우상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할 것인가. 무엇이 우상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뿌리내리게 하는가. 본질이 아닌 것이 본질이 되기 위해 갈망하는 것, 허상을 우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서사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구명회는 자신의 전부인 가족을 잃은 유중식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구명회의 편이 된다면, 그의 적마저 그의 아군이 되어준다면, 그보다 좋은 서사는 없을 것이다. 유중식은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을 불태우고, 자신의 열정적인 숭배자들을 더욱 열광시킬 훌륭한 장작이 되어줄 테다.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그 자신도 뗄감으로 삼는다. 그의 얼굴은 흉해졌고, 더 이상 예전처럼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은 열광시킨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지닌 서사이므로.
3. 참수 : 바람은 눈을 가린다.
영화는 몹시 압축적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한 장면 한 장면 의미가 있는 듯 보여 열심히흐름을 좇고 영화가 끝나면 탈진할 정도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중 나뭇잎 등 몇몇 장치들은 맥거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머리를 잘리는 사람들과 닭 그리고 요한까지, 참수는 왠지 놓쳐서 안 되는 중요한 코드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구명회의 연설 장면은 구명회를 직접적으로 비추기보다 그 장면을 송출하는 화면에 몰두한다. 청중들의 눈은 온통 구명회에게 쏠려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구명회와 영화를 통해 우리가 마주한 구명회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우상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그것의 본질이 실제로 어떤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제대로 던질 의지라곤 눈꼽만큼도 없어 타자에게 채 가기도 전에 힘없이 떨어지는 야구공처럼 전달되지 않는 대사들은 어쩌면 이 점을 비꼬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마주하면 이해할 수 있을만한 동기를 찾으려 한다. 불완전한 서사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서사만이 사람들을 납득시킨다. 영화 속 대중들은 구명회의 완벽한 서사에 열광하지만 관객은 감독 스스로 표방한 바, 그 불친절하고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 전개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이게 뭐지?”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한가? 그렇다면 없는가? 있어도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제대로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 그러한가? 눈과 귀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입으로는 비본질적인 것을 재생산하며 더욱 본질을 흐린다. 바깥세상을 지각해야 할 감각기관들이 있어도 없느니만 못할 때, 우상에 사로잡혀 본질을 놓칠 때, 머리는 속수무책으로 참수 당한다.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 새장에서 평생을 살다 목이 잘린 닭처럼, 최의원이 맛있게 뜯어먹던 치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