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은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난돌 Apr 02. 2019

방관, 악이 싹트는 자리

《바이스》, 애덤 맥케이, 2019, 브런치 무비패스#5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용한 이를 조심하라
그는 다른 이들이 이야기할 때 관찰하고, 행동할 때 계획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쉴 때 공격한다




1. Vice [형용사] ~대신에, ~대리로서
  《바이스》는 딕 체니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미국의 46대 부통령이 되기까지 왜, 어떻게 정계에 진출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들을 거쳤는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딕 체니의 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시에 정계 입문에 있어 가장 큰 동기가 되어준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 린 체니다. 딕 체니가 대학을 때려치우고 전선을 설치하는 일을 하며 술에 중독되어 계획 없이 살자 린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계속 지금처럼 망나니 같이 산다면 그를 떠나겠노라고. 린은 권력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여자는 가정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시대적 한계를 넘기 위해서 그녀는 “남자를 잘 골라야만” 한다. 특히나 린이 술독에 빠져 사는 남자를 혐오하는 것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술에 쩔어 걸핏하면 그녀와 그녀의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딕은 린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첫 발을 내딛는다. 그가 정치라는 공직에 입문한 것은 어찌 보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는 지극히 사적인 동기에서 기인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바이스》를 가르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어느 날, 린은 비보를 듣는다. 수영을 할 줄도 모르고, 물을 좋아하지 않아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어머니가 익사했다는 것이다. 정황상 린의 아버지가 해꼬지 한 것이 틀림없지만, 경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당시의 통념상, 가정 폭력은 가정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고, 공권력이 끼어들 틈 없는 사적인 영역이었기에.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린의 적극적인 “내조”를 받으며 딕 체니는 그녀의 욕망을 충실히 “대리” 수행한다. 정치인으로써 승승장구하며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어 린에게 명예와 영광을 안겨준다. 딸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표심을 얻지 못할 것이자명하자 정계를 은퇴(그 때까지는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한 후, 석유 회사의 정책 자문위원이 되어 경제적으로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정계로 복귀하게 된 것은, 아들 부시가 그에게 러닝 메이트로서 부통령직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죽어야만 그 자리를 대신하는 자리. 어쩌면 허울뿐인 자리. 그러나 그는 딕 체니는 오히려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한다. 부시를 구슬려 실질적인 권한과 결정권을 손아귀에 넣고는, 자신은 대통령의 뒤에 슬그머니 숨어 허수아비의 외양을 자처한다. 결국 아내의 욕망을 대신 추구했고, (영화상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이 글에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은) 럼즈펠드가 시키는 일을 토달지 않고 묵묵히 수행했으며,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직책 역시 누군가의 “대리”였던 딕 체니는 그렇게 조용히 권력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는다.


2. Vice [명사] 악, 악덕 행위

  영화의 내레이터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힘들수록 정치 따위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당장 세금을 내고, 월급을 받아 내일 저녁을 사는 사적인 일만으로도 허덕이는데, 정치 같은 공적인 일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아니, 상관없는 이야기다. 내가 신경 쓴다고 뭐가 바뀌기나 하는지?

  그리고 권력자들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내 손가락을 살짝 긁히기보다 차라리 세상 전체가 파괴되는 것을 선호한다고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에게 캄보디아의 수백, 수천 만 명의 목숨 자체는 안중에도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게 하느냐이다. 그들의 공적인 결정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이들의 사적인 삶을 초토화시켜버린다. 그리고 30년 뒤, 딕 체니 역시 같은 생각으로 명분 없는 전쟁을 8년을 이어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딕 체니는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국민의 선택을 “대리 수행”했을 뿐이라고. 권력자들은 악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절차에 이해 권력을 위임받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내 팔로 만든 울타리 밖의 일은 나몰라라 한 시민들의 무관심과 방관을 대리 수행한 것이다. 

  딕 체니의 일대기를 읊은, 딕 체니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평범한 시민이었던 내레이터는 급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그의 심장을 딕 체니가 이어받는다. 결국, 시민의 무관심은 그들의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오늘날의 미국 보수주의에게 수혈을 한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제대로 감각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